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6주 말씀에서 우러난 헌신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암 8:1-13
1 주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보이셨느니라 보라 여름 과일 한 광 주리이니라 2 그가 말씀하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 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3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곳곳에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그 시체들을 내어버리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6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7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 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8 이로 말미암아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주민이 애통하 지 않겠느냐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뛰 놀다가 낮아지리라 9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 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게 하며 모 든 사람에게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듯 하게 하며 결국은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 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응송 | 시 5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서신 | 골 1:15-29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 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 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 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 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 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 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복음 | 눅 10:38-42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 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 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 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10:42절을 묵상하십시오.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했던 마르다와 달리 마리아가 선택했던 '좋은 편'이란 무엇이었습니까?
② 암 8:11절을 묵상하십시오. 양식이 없어 주림보다, 물이 없어 갈함보 다 더 고통스러운 심판은 무엇입니까?
③ 골 1:25절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육체로 감 당하며 동시에 바울이 이루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배움'에서 '뜻을 정함'으로 '뜻을 정함'에서 '실천'으로 | 두 번째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J. Vermeer)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오신 예수'라는 성화가 있습니다. 1654-1656 사이에 그려진 작품이고 현재는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성화는 오늘 복음서의 장면을 섬세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마르다를 향하시고, 마르다를 향해 무언가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손은 마리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보고 계시는 마르다는 예수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빵을 바구니에 담아 손에 들고 있고, 예수님이 손으로 가리키고 계시는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성화 작가가 왜 예수님의 말씀과 시선은 마르다를 향하시고, 예수님의 손가락은 마리아를 향하시게 했는지, 그 의도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누가는 이 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오신 예수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 눅 10:38, 39
이 장면을 해석하는 시각은 다양합니다. 가장 전통적인 해석은 이 장면이 활동적인 삶보다 말씀을 듣는 삶의 우선순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시각입니다. 그러한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누가가 이 장면과 지난 주 복음서에서 보았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를 나란히 배치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영생의 길을 물었던 율법교사는 자신이 배움을 통해 터득한 율법 지식에 대해 뜻을 깨달으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시험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율법 지식을 무색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심으로써 뜻도 알려 하지 않고, 실천도 하려 하지 않는 율법교사의 부질없는 지식을 돌아보게 하시고, '하나님 말씀을 진정으로 들음'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눅 8:4-21에서도 네 가지 밭의 비유를 통해 말씀을 듣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오늘 말씀에서 보이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예수님을 대하는 각각의 태도를 통해서도 누가는 '말씀을 경청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의 보도와 위의 그림이 환대와 관련한 주제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각 역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환대는 분주하고 산만한 음식 준비가 아니라, 당신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첫 번째 시각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이 장면을 마리아의 여성 해방 노력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여성의 공간인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마르다의 모습은 당시 사회가 여성들에게 부여한 역할에 충실한 것이었지만, 남성의 전유물인 거실에 앉아 남성처럼 예수님 말씀을 경청한 마리아의 모습은, 그녀가 남녀를 구분하는 집안의 경계선을 넘어섰을 뿐 아니라, 사회적인 통념의 경계선도 넘어선 것이라는 시각입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마음의 분주함 끝에 불평을 터뜨리고 만 마르다에게 '마리아가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눅 10:40-42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성경 주석가들은 이 주님의 말씀이 마르다의 봉사를 폄훼한 것이라거나 마르다가 보여준 섬김과 봉사보다 마리아가 보여준 경청하는 태도가 우월함을 말씀하신 것이라는 주장에 반대합니다. 특히 존 칼빈은 주님의 이 말씀이 봉사보다 명상적 삶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비판합니다. 현대의 여성신학에서도, 마르다는 봉사의 역할을 맡음으로 실패했고, 마리아는 남성들같이 배움으로 성공했다는 해석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정말 마르다의 입장에 서서 이 장면을 재해석 해보자면, 그녀가 보여준 환대와 섬김은 지난 주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 하신 이웃의 마땅한 도리를 마르다가 실천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반면에 마리아가 아무런 봉사도 섬김도 없이 예수님 발치에만 앉아있는 모습을 보인 것은 실천 없는 신앙의 예(例)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마르다의 사랑 실천을 칭찬하시지 않고 오히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 질문과 관련해 우리의 영적 상상력을 도와줄 흥미로운 성화가 하나 있습니다. 돈 디에고 벨라스케스(Don Diego Velasquez)가 그린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1618년 작품이고 현재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성화를 자세히 보면 잔뜩 화가 나 있는 마르다의 표정 뒤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는 마르다의 모습이 거울로 보입니다. 거울을 이용한 벨라스케스의 화법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마르다의 시선이 앞에 계신 예수님과, 예수님 발치의 마리아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작가의 상상력과 함께 우리도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마르다가 왜 저렇게 화가 난 표정일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런 마르다를 향해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눅 10:41, 42 공동번역)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물음을 전제로 마르다의 섬김과 환대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겠습니다.
지금 주님은 육신을 입고 계십니다. 당연히 굶주림과 목마름을 몸으로 느끼며 마르다와 마리아 집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 마르다는 깊은 애정을 가졌고, 서둘러 먹고 마실 것을 준비하려 마음을 썼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그 마음 씀은 아름다웠습니다. 지금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선(善)에 몰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성화에서 보듯 마르다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는 고마움과 사랑이 가득 배었고, 음성 또한 부드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의 투정에 대한 예수님 말씀은 어떤 반박이거나 책망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랑을 가득 담아 다독거리는 말씀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마음 쓰여 하시는 것은 마르다가 '많은 일'에 다 마음 쓰며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많은 일'(눅 10:41)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음식의 가지 수(數)일 수도 있고, 영적인 일과 육신의 일 두 가지를 동시에 다 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마음이 분주해졌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향한 야속함도 밀려옵니다. 그런 마르다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만'(눅 10:41) 잘하자고 하십니다. 그 한 가지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굶주리고 목마른 손님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지나가 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남은 한 가지는 마리아처럼 '말씀을 듣는 것'인데, 손님의 배고픔을 간과하고 말씀만 듣는 마리아 같은 행위는 앞에서 본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무정하고 이기적인 행위가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마리아에 대해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고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성찰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수위성의 측면입니다. 마르다의 헌신이 지나가 버리는 것이라면, 말씀 듣는 마리아의 태도는 영원을 향한 것이기에 마르다의 선택에 비해 더 좋은 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인 것은 육신을 위한 양식보다 생명을 위한 양식을, 순간을 위한 양식보다 영원을 위한 양식을 더 귀하게 여겼다는 의미이겠습니다.
둘째는, 순서의 측면입니다. 마르다의 헌신과 섬김이 불만으로 치달은 것은 그것이 말씀에서 우러난 실천이 아닌, 자신의 성품과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배움이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을 때 허무한 것이듯, 실천이 배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때 마르다처럼 자칫 불평에 빠져들거나 자기 과시로 치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했던 마르다의 헌신은 한 번으로 지나갔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 생명의 말씀을 전해들은 마리아의 배움은 예수님 십자가 아래까지(마 27:55;막 15:40;눅 23:49;요 19:25), 예수님 무덤의 장례까지(마 28:1;막 15:47;눅 23:55-56;요 20:1), 예수님 부활의 증언까지(마 28:8;막 16:9;눅 24:9;요 20:18), 그 헌신이 식지 않고 이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마르다의 헌신이 육신의 배부름을 위한 헌신이었다면, 마리아의 헌신은 주님의 복음을 위한 헌신이었다는 점에서 영적이고 본질적인 헌신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에서 '더 좋은 편'이란 먼저 말씀 앞에 앉는 것입니다. 나의 성품이나 기질에서 우러난 헌신은 지치기 쉽고, 행여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불평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성령의 도우심 속에 진득하게 앉아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 하는 헌신은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거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도 없거니와, 하나님 나라에 닿도록 영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아모스가 바로 그런 헌신의 사람이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보이셨느니라 보라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이니라 그가 말씀하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곳곳에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그 시체들을 내어버리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암 8:1
여기서 우리가 보는 아모스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이신 환상을 볼 뿐 아니라, 들려오는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게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 구약성경에서 아모스의 자기소개를 보았듯이, 그는 선지자가 아니고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며, 그저 목자이고 뽕나무를 기르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암 7:14). 그런 그가 양 떼를 몰고 갈 때, 여호와께서 그를 데려다가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신 것입니다(암 7:15). 암 1:1절에도 보면 아모스가 등장하던 시기와 아모스라는 인물에 대한 소개가 나오는데, "드고아에서 양을 치던 목자 아모스의 예언집. 그는 이스라엘이 어찌 될지 계시를 받고 그대로 예언하였다"(공동번역)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문적인 선지자가 아닌 양을 치는 목자이고 농부인 그가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예언했다는 기록을 읽으면서 우리는 동시대의 종교적 상황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들려오고 있는데, 그 어떤 선지자도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소위 선지자라는 사람들은 두 선택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부패한 사회를 향해 외치든지, 아니면 적당히 정치권력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종사하며 살던지 입니다. 그런데 양치기요 농부인 아모스가 계시를 듣고, 그 계시를 들고 거리로 나서 심판을 예언했다는 것은, 당시 선지자들이 사회에 편만한 문제를 외면하고 정치권력의 눈치나 살피며 굴종했다는 반증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사회적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성경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 암 8:4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 암 8:6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는 행위는 권력자들의 횡포 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시장에서는 곡물을 팔 때 거짓 되로 양을 속이고, 거짓 저울로 무게를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심지어 사람을 매매하는 것도 불사했습니다. 그런데 곤혹스럽게도 아모스는 우리에게 그들이 신앙인이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 암 8:5
그들이 월삭과 안식일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돈이라면 못할 짓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월삭과 안식일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가짜 되와 저울로 사람을 속여 돈을 챙겼습니다. 아모스는 그들을 향해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암 8:7)시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무서운 심판의 계획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내용이 우리 시선을 끕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 암 8:11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기갈',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아모스는 분명히 합니다. 그러한 기갈을 영혼에서 느껴보신 적 있습니까? 혹시 기갈을 느끼지 조차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중병에 들었을 때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로버트 멀홀랜드는 '영성형성을 위한 거룩한 독서'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이신 말씀은 '인간생활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현존과 목적과 능력의 작용'이라며,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현존과 목적과 능력의 작용이며,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와 여러 인물들의 삶속에서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현존과 목적과 능력에 대한 이야기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영의 양식을 듣지 못하는 기갈을 육의 양식을 먹지 못한 기갈보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영의 양식인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내 존재와 삶 속에 하나님의 현존과 목적과 능력의 작용이 활발하게 벌어질 때만 우리 존재의 근본이 든든히 세워지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골 1:23, 24
우리가 믿음 안에 있고, 예수님 위에 굳게 서서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할 때만, 우리는 바울처럼 괴로움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우리 육체로서 감당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내적 상황은 얼굴을 통해 드러납니다. 아모스가 보여준 말씀에 대한 순종과, 마리아가 보여준 말씀에 대한 열망과, 들려온 말씀 즉 복음의 일꾼이 되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워 감당했던 바울이 보여준 믿음의 모범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누군가 우리 얼굴을 화폭에 담는다면 마르다처럼 화난 얼굴이 아닌, 말씀으로 말미암아 행복한 얼굴로 그려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내 열정으로 시작한 섬김이 권태와 불평으로 이어진 적은 없는가?
② 말씀이 동기가 된 실천으로 기쁨과 감사로 형제를 섬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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