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5주 배움에서 뜻을 정함으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암 7:7-17
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 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8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 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 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9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 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 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12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 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13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 니라 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 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15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16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고하지 말라 하므로 1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 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응송 | 시 82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서신 | 골 1:1-14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 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 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 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 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 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복음 | 눅 10:25-37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 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 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 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 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 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암 7:10-13을 묵상하십시오. 아모스에게 다림줄의 경고를 전해들은 아마샤는 이후의 반응으로 미루어 어떤 사람으로 여겨집니까?
② 눅 10:31-35을 묵상하십시오.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을 때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
③ 골 1:3-6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의 세 가지 감사의 이유와, 복음이 골로새 사람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배움'에서 '뜻을 정함'으로
'뜻을 정함'에서 '실천'으로
러시아연방과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러시아정교회가 전쟁을 지지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최근 정교회 안팎에서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의혹의 이유로는 전 세계에 있는 15개의 정교회 독립교회 중 하나인 러시아정교회의 총대주교가 지금까지 전쟁 범죄를 규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직간접으로 축복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실제 러시아정교회의 대표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신성한 전쟁'이라고까지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수장인 바르톨로메오스 세계총대주교는, 이 전쟁은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성한 전쟁도, 축복받은 전쟁도 아니며 '악마적이고, 신성을 모독하는 불경건한 전쟁'이라고 규탄했습니다. 정교회 한국대교구의 조성암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우크라이나에서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 이웃과 형제들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직접 고통을 받고 계시다는 깊은 확신이 있다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는 자는 그리스도를 향해 총을 겨누는 것' 이라고 규탄했습니다. 전쟁에 대한 러시아정교회의 태도와 그로 인한 정교회 안팎의 비판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됨'에 대해 냉정하게 성찰하게 됩니다. "하나님 형상인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 없이도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은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 사랑 대신 증오를, 빛 대신 어둠을, 생명 대신 죽음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반대편에 서 있으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한다면 그것보다 더 모순적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 모두를 이 질문 앞으로 데리고 갑니다.
먼저 구약성경은 제사장이면서도 말씀보다는 권력에 취해 살아가는 아마샤라는 인물을 보여줍니다. 말씀보다 권력이 더 중요했기에 그는 이간질을 마다하지 않았으며(암 7:10), 왕의 권력을 뒤에 업고 선지자를 위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암 7:12, 13). 한편 복음서는 율법 교사를 보여줍니다. 그는 율법의 실천으로서 사람을 사랑하려는 노력보다, 율법의 지식으로 사람을 시험하려고 합니다(눅 10:25). 그런가하면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온 천하에서 열매를 맺어 자라고 있음에 감사를 표합니다(골 1:6). 들음과 깨달음이 삶의 열매로 연결될 때만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은 성립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먼저 보겠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 시기 이스라엘은 주변나라들의 쇠퇴로 인해 상대적으로 번영과 안정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앗시리아는 우라르투 왕국의 공격을 방어하느라 약해져 있었고, 다메섹 역시 북쪽 하맛과의 싸움으로 국력이 쇠약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북방의 강대국들이 전쟁에 휩싸여 국력을 소모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상대적으로 군사적, 경제적 신장을 이루어 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경제가 신장되고, 나라가 안정될 때, 정치인과 관료들이 부패하기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주변 나라들의 도발이 없고 나라가 안정되자, 왕과 관료들과 종교가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왕과 관료들의 부패는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와 불평등를 초래했습니다. 왕을 비롯한 지배집단이 부를 독차지한 채, 겨울 궁과 여름 궁을 두고(암 3:15), 값비싼 상아침대에서 음탕한 향연을 벌일 때(암 6:4), 가난한 이들은 신 한 켤레 값에 종으로 팔렸고(암 2:6), 힘없는 이들은 티끌먼지 속에 발로 짓밟혔습니다(암 2:7). 관리들은 힘없는 백성들에게 부당한 세금을 부과했고(암 5:11), 재판관은 뇌물을 받고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했습니다(암 5:12). 선지자가 없어서 시대가 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델의 제사장인 '아마샤'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제일의 종교중심지인 벧엘(암 4:4;5:5, 6, 21-24)의 제사장이었던 그는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호하기보다는 귀족 신분을 꿰차고 앉아 권력자들의 이익에 종사하며 재물이나 탐하고 이간을 펼치는 간신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더 사용하실 수가 없어 뽕나무를 배양하는 일개 농부인 아모스를 불러 악한 시대를 경고할 선지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시대가 어두울 때, 성직자들과 교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이 사례를 통해 봅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환상을 근거로 심판을 예언합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 암 7:7-9
여기서 '다림줄'은 히브리어로 아나크(ךנא)입니다. 주석(朱錫)이나 납덩이가 달린 측량 추(錘)로 담을 쌓을 때 수직을 재는 도구입니다. 건축가가 담을 세운 후 다림줄로 재어보았을 때, 기울어져 위험하다 싶으면 허물어버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입니다. 그런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정의가 기울고 공의가 굽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림줄을 직접 손에 들고 재어보시겠다는 겁니다. 공의로운 하나님께서는 심판 또한 매우 공정하게 집행하실 것입니다. 이 다림줄 심판의 경고를 들었을 때, 당시 권력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비수처럼 그들의 심장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엄중한 순간에 아마샤가 왕과 아모스의 사이를 이간(離間)합니다.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 암 7:10-13
아마샤는 여로보암 왕에게는 "아모스가 왕을 모반한다"(암 7:10-11)고 말하고, 아모스를 향해서는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해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암 7:12-13)고 조롱합니다. 대개 사람은 자기 수준대로 말도 하고 행동도 합니다. 자기가 떡을 밝히는 종교인이었기 때문에, 아모스도 그러리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얼마나 정신이 부패해 있으면 종교지도자가 떡이나 밝히면서 부끄러움조차 모르겠습니까? 타락한 종교가 얼마나 동시대의 공해거리인지, 타락한 성직자가 얼마나 세상을 어지럽히는지, 우리는 아마샤를 통해 봅니다. 한편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한 율법교사를 보여줍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눅 10:25
대개 질문은 왜 하는 것입니까? 알기 위해, 깨닫기 위해 합니다. 더욱이 성경에 관한 질문은 그 안에 감추어진 진리와 그 의미를 깨닫기 위해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구도자(求道者)'라고 합니다. 진리를 향한 깨달음의 경지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제갈량이 여덟 살 난 아들 '제갈첨'에게 소중한 삶의 진리를 담아서 보낸 편지인 '계자서(誡子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非學無以廣才(비학무이광재), 非志無以成學(비지무이성학)' 공부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공부가 왜 필요한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인데,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펼칠 수 없고, 뜻이 없으면 학문을 성취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은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배움을 통하지 않고는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의미이고, '뜻이 없으면 학문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은, 살아갈 인생의 의미 즉 뜻이 분명하지 않으면, 참된 배움을 이룰 수 없다는 의미이겠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단지 출세와 성공만을 위해 공부합니다. 물론 그런 공부도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뜻이 결여된 배움은 스스로에게도 사회에도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율법교사를 보십시오. 그는 학자이자 교사였습니다. 그런 그가 '깨달음'이 목적이 아닌 '시험(test)'을 목적으로 질문합니다. 출세한 인재였지만, 불행한 사람입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으십니다(눅 10:26).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라는 질문은 율법을 배웠는지를 묻는 물음이고, "네가 어떻게 읽느냐"는 물음은 그 배운 율법이 동시대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겠느냐, 즉 '율법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겠습니다. 그는 신 6:5절과 레 19:18절을 인용해서 잘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 눅 10:27
이 대답은 유다 전승에 기초한 것이고, 율법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맞출 수 있는 정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네 대답이 옳도다"(눅 10:28)라고 인정해주십니다. 그런데 다음 말씀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 눅 10:28
배움보다 중요한 건 의미이고, 의미보다 중요한 건 실천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율법교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라며, 이번에는 이웃의 자격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두 번 째 질문에서 그의 질문의 의도를 눈치 채고 맙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눅 10:29a),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b) 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 질문 속에는 이웃 개념에 대한 그의 편협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은 자기 이웃의 자격을 묻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동족만 자기 이웃이 될 자격이 있다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혹은 예수님 시대 이웃 이해의 변화를 따라 종교적, 정치적, 이념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자기 이웃으로 이해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의 물음에 대해 예수님은 직접 답하시지 않고, 비유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길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옷도 빼앗기고, 거의 죽게 되어 버려져 있는데(눅 10:30),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해 지나가고(눅 10:31),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눅 10:32). 그런데 같은 상황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케네스 베일리(Kenneth E. Bailey)는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에서 11세기 바그다드의 신약학자인 '이븐 알 타이이브(Ibn al-Tayyib)'가 제시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의 일곱 장면'을 소개합니다. 앞선 두 사람이 못 본 체 피해 지나간 그 사람에게 사마리아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갑니다(눅 10:34a). 그는 다친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습니다(눅 10:34b). 우리가 읽은 개역성경은 먼저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그 다음 상처를 싸매준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시리아어와 아람어 역본에서는 셈어 문법을 따라 상처를 싸매주는 행위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는 행위가 묘사된다고 합니다. 상처가 깊을 때는 먼저 상처를 싸맨 다음에 약을 부어 약이 그 싸맨 것을 통해 상처로 스며들게 할 때도 있었는데, 오늘 말씀은 그 경우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실제 1세기에는 가끔씩 기름과 포도주를 섞어서 상처를 치료하는 약을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비유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이웃에 대한 율법교사의 협소하고 이기적인 관념을 부수어 확대시키십니다.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 어떻게 만났든 모두가 내 이웃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세심하게 보면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또 하나 관점의 차이가 보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라는 율법교사의 물음에, 주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라고 되물으십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라고 묻기 이전에 먼저 "나는 이웃이 되어주었는가?"를 성찰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강도질 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닌 사마리아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성직자였습니다. 율법교사가 신 6:5절과 레 19:18절을 인용해 잘 대답했듯이, 그들 역시 같은 말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사람을 목격한 그들의 행동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눅 10:31),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2). 제갈량의 '계자서'를 들어 그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배움'을 통해 율법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살아갈 인생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배움은 참된 배움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어쩌면 그는 율법을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보여주었던 행동들 중에서 '불쌍히 여긴' 그의 마음에 주목하십니다. '불쌍히 여긴' 그 마음이야 말로 이웃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븐 알 타이이브'는 이때 이 사마리아인이 다친 사람을 데리고 간 곳이 '여리고'였다고 콕 집어 이야기 합니다. 사실 사마리아인이 다친 유대인을 자기 짐승에 태우고 유대인 동네에 들어가는 행위는 매우 위험했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을 오해해서 그에게 복수할 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친 사람에 대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희생을 다합니다. 그 마음이 이웃의 마음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너희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골 1:3)고 말합니다. 골로새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어땠기에 바울이 그토록 감사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 골 1:4, 5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울의 감사의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에서 비롯된 믿음이었습니다. 둘째는 골로새 교인들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이었습니다. 셋째는 골로새 교인들의 소망 때문입니다. 그들의 소망은 하늘에 쌓아 둔 것으로 믿음과 사랑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매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 골 1:6
그들은 복음을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복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즉 그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배움'의 열매이며, 배움에서 그치지 않고 '뜻'을 묻고 '깨달은' 결과로 그들 삶속에 맺힌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깨달음에서 그치지 않고 온 천하에 열매 맺어 자라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배움에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배운 후 뜻을 묻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뜻을 깨달은 후에는 온 천하에서 열매 맺어 자라고, 배우고 깨달은바 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배움은 있으나 뜻을 정함도 실천도 없는 신앙이지 않은가?
② 배움을 넘어 뜻을 정하고 실천함으로 열매 맺는 신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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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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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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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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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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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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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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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