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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4주 마음의 사막, 변형의 용광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7-02 13:20
조회
729
성령강림 후 제4주 | 맥추감사주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왕하 5:1-14
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 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 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 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 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 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 리이다 하니라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 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 려 분노하여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 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 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응송 | 시 30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서신 | 갈 6:(1-6) 7-17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 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 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 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 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복음 | 눅 10:1-11, 16-20
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 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 을 먹고 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 와서 말하되 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 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 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 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 묵 상 | meditatio
① 갈 6:14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고백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② 왕하 5:9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러 오며 말들과 병 거를 거느리고 온 나아만 장군에게서 무얼 느끼게 됩니까?
③ 눅 10:20을 묵상하십시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며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 기 도 | Oratio
■ 묵상 나눔
한 해의 절반을 걸어온 끝에 마침내 남은 절반의 분기점인 7월을 맞았습니다. 새해와 함께 떠난 6개월의 시간여행 동안 무엇을 마음에 품어왔는지, 무엇에 이끌려 살아왔는지, 마침내 한 해의 절반을 통과하면서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르투로 파올리(Arturo Paoli) 신부는 '사막일기'에서 600 킬로미터에 이르는 사하라 사막을 행군하는 동안 자신에 대해 깨달은 바를 진솔하게 고백합니다. 그는 지금껏 자기중심적 삶을 살았으면서도 시인하지 않고 누구보다 이타심이 강하다고 으스대기도 했는데, 사막에 던져지고, 도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은총 속에서 그분과 함께 동반하는 동안 결국 자신이 이기적으로 살았음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사막은 그의 모든 것을 털어내게끔 하는, 또한 과거의 그는 죽고 다시 태어나게끔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 공동번역)고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신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여정인데, 그 거듭남을 위해 그는 사하라 사막을 행군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인 믿음을 버리고, 예수님과 우정을 나누고, 세상에 평화를 이루시려는 예수의 뜻을 따를 수 있을 만큼 믿음이 자랐습니다. 그런 그가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사막은 단순히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사막도 있다. 마음의 사막은 우리 마음을 자유롭게 하고, 우리 마음에 거룩하신 분께서 머무시게끔 한다."
왜 우리가 마음의 사막을 통과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사람과, 자신이 죽고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요 3:7)은 신앙하는 태도와 그로 인한 결말이 하늘과 땅 만큼 다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날조되고 거짓된 자아(自我 ego), 왜곡되고 부풀려진 자아를 진짜 자기라 여기고 거기에 속아서 살아가는데, 스스로 거룩하다고 자신하는 신앙인일수록 이 날조되고 거짓된 자아는 더 강화됩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이 거짓된 상태가 고착되어 새로 태어나는 것에 실패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요 3:3), 들어갈 수도(요 3:5)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든 거짓된 상태를 깨기 위해 우리를 이끌어 마음의 사막에 직면하도록 하십니다. 우리를 마음의 사막으로 이끄는 도구는 상처나 병이나 경제적 위기일 수도 있고, 고요와 침묵 속의 성찰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막에 던져 넣으시고, 그 심연(深淵)에서 우리를 만나주실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보게 하심으로 그 동안 앞만 보고 달리는 것에 마음 빼앗겨 하나님과 분열되어 있던 지성과 감성과 의지, 즉 날조되고 거짓된 자아를 거두어들이고, 당신과 일치된 참 자아를 갖추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노력을 보게 됩니다.
먼저 구약성경은 나아만 장군을 보여줍니다. 그에 대한 저자의 소개가 재미있습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왕하 5:1). 드러난 나아만과 감춰진 나아만이 다른 것, 거기에 그의 치명적인 모순이 있었습니다. 그는 분노와 갈등을 거듭하던 끝에 마침내 장군의 위세 뒤에 감추어진 거짓된 자신을 내려놓고 더러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금으로써 새롭고 참된 존재로 거듭납니다(왕하 5:14). 복음서에서 전도를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은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라며 의기양양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시며, 정말 중요한 것은 드러난 외적 현상이 아니라 감추어진 내면의 복음화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고 당부합니다. 사람들은 타인을 보는 동안에는 자신에 대해 성찰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온유함으로 타인을 바로잡아 준 후에 '두려움으로 자신을 살펴보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간과하기 쉬운 자기성찰을 독려해 주는 귀한 가르침입니다. 서신서의 말씀을 계속 보면,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사도 바울은 거듭거듭 '스스로 속이지 말고 자신을 살필 것'을 당부합니다.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채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은 영적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속아서 살아가는데, 그런 상태로 무언가 심는다는 건 불행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심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있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각각의 결과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당시 갈라디아 신자 중에는 유대인들의 삶을 모본으로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는 등 율법을 준수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런 행동이 육체를 위해 심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따라 육체에 희망을 심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완벽하게 따르지도 못하면서 구원을 이룬 것으로 스스로 속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자기 고백적입니다. 한때 자신도 육체를 신뢰했었습니다. 빌 3:4-6에서의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한때 그는 이 자기 확신에 너무 몰입해서 타인의 신앙을 이해하지 않던 자였습니다. 자신이 혈통에 있어서나, 율법에 있어서나, 학벌에 있어서 너무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를 만납니다(행 9:4). 그 충격적 체험은 그로 하여금,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행 9:8),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사흘을 보내게 했고(행 9:9), 그의 눈을 가린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게 했습니다(행 9:18). 뿐만 아니라 그는 아라비아 사막에 던져져(갈 1:16-17), 3년여 동안 자신을 새로이 바라보게 되는데, 오늘 고백은 그렇게 사막에 던져져 자신을 치열하게 성찰한 자로서 내린 결론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그 동안 자신이 가졌던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랑을 '육신을 따른 자랑'(고후 11:18)이라고 단정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과대 해석해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정은 먼저 내 안의 죄를 처절하게 인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나를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여정입니다. 스스로에 대해 속지 않고, 흙으로 돌아갈 육체의 한계성과 덧없는 나의 정신세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소망할 때, 마침내 주님 안에서 참 평화와 쉼을 얻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감추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초라한 나를 감추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고 우리를 불러내어 당신 앞에 정직하게 세우고 싶어 하십니다. 따라서 가장 '나다운 나'를 만날 수 있는 길은 내 안의 거짓 자아의 실체를 정직하게 대면해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아를 실현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본을 바울에게서 봅니다.
화려한 말들과 전차와 군대, 이 겉치장이 단지 병을 고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는 나아만 장군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에 대해 이렇게 귀띔합니다.
그의 겉치장 된 위엄 이면에서는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그를 내다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합니다(왕하 5:10). 그는 모욕감에 몸을 떱니다(왕하 5:11). 내면의 비참함이 표정에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는 살기 위해 순종합니다. 더러운 요단 강물에 그의 몸이 잠길 때, 그의 겉치장 된 자아가 함께 수장됩니다. 한 번, 두 번, 횟수를 거듭할 때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원죄가 그의 나병 껍데기와 함께 씻기어 나갑니다.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와 인간관계 속에서 내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심리기제를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강하게 보이려 노력하고, 똑똑하게 보이려 합니다. 어떤 이는 재산으로, 어떤 이는 학벌로, 어떤 이는 인맥으로, 어떤 이는 옷으로 겉치장을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자아상은 정확하게 인류가 가진 거짓 자아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이 거짓 자아가 요구하는 상(像)을 보여주기 위해 덕지덕지 껴입은 겉치장을 벗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욕구와 불미(不美)한 감정들을 사실 그대로 고백하며 예수님께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당신의 피로 우리를 씻어 참되고 건강한 자아를 회복시켜주십니다. 오늘 복음서에 보면 칠십 인을 세우시고 둘씩 짝 지어(눅 10:1), 평안을 빌어주고,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보내셨던 제자들이 기쁨에 가득 차 돌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이 한껏 고무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귀신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주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능으로 그들은 귀신을 제어했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승리를 함께 기뻐해 주십니다.
하지만 이어서 주님은 보다 중요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본(本)과 말(末)을 혼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귀신들을 항복시킨 것도 기쁜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더 기뻐해야 할 일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일의 성취도 기뻐해야 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존재론적 성취'입니다. 사도 바울의 기쁨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자기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자기가 죽은 기쁨입니다(갈 6:14). 더욱이 자기 몸에 찍힌 예수의 흔적을 볼 때마다(갈 6:17), 그는 '예수의 흔적이 새겨진 자신'에 대해 기뻐했습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으며 우리가 진정으로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지난 6개월 동안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내 삶에도 감사하며 기뻐해야 하겠지만, 내 존재에 새겨진 십자가의 흔적, 내 몸에 흐르는 예수의 피로 인한 감사와 기쁨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과 더불어 성찬례에도 초대받았습니다. 이 성찬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 존재 안에는 나를 위해 찢기신 주님의 살이 차오르고, 나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가 흐릅니다. 이 기가 막힌 은총이 내 존재에 가득한데, 주님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희생하신 흔적이 내 존재에 새겨져 있는데, 재산이니, 학벌이니, 인맥이니 하는 섣부른 겉치장으로 그 소중한 은총을 가려서야 되겠습니까? 한 해의 절반지점을 막 돌아서는 오늘 말씀과 성찬을 마음의 사막으로 삼아, 겉치장에 왜곡된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 남은 반년을 참 사람으로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나의 재산이나 인맥이나 학벌이 곧 나라고 속고 있지 않은가?
② 나의 연약함을 대속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보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왕하 5:1-14
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 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 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 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 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 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 리이다 하니라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 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 려 분노하여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 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 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응송 | 시 30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서신 | 갈 6:(1-6) 7-17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 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 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 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 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복음 | 눅 10:1-11, 16-20
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 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 을 먹고 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 와서 말하되 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 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 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 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 묵 상 | meditatio
① 갈 6:14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고백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② 왕하 5:9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러 오며 말들과 병 거를 거느리고 온 나아만 장군에게서 무얼 느끼게 됩니까?
③ 눅 10:20을 묵상하십시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며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 기 도 | Oratio
■ 묵상 나눔
마음의 사막, 변형의 용광로
한 해의 절반을 걸어온 끝에 마침내 남은 절반의 분기점인 7월을 맞았습니다. 새해와 함께 떠난 6개월의 시간여행 동안 무엇을 마음에 품어왔는지, 무엇에 이끌려 살아왔는지, 마침내 한 해의 절반을 통과하면서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르투로 파올리(Arturo Paoli) 신부는 '사막일기'에서 600 킬로미터에 이르는 사하라 사막을 행군하는 동안 자신에 대해 깨달은 바를 진솔하게 고백합니다. 그는 지금껏 자기중심적 삶을 살았으면서도 시인하지 않고 누구보다 이타심이 강하다고 으스대기도 했는데, 사막에 던져지고, 도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은총 속에서 그분과 함께 동반하는 동안 결국 자신이 이기적으로 살았음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사막은 그의 모든 것을 털어내게끔 하는, 또한 과거의 그는 죽고 다시 태어나게끔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 공동번역)고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신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여정인데, 그 거듭남을 위해 그는 사하라 사막을 행군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인 믿음을 버리고, 예수님과 우정을 나누고, 세상에 평화를 이루시려는 예수의 뜻을 따를 수 있을 만큼 믿음이 자랐습니다. 그런 그가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사막은 단순히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사막도 있다. 마음의 사막은 우리 마음을 자유롭게 하고, 우리 마음에 거룩하신 분께서 머무시게끔 한다."
왜 우리가 마음의 사막을 통과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사람과, 자신이 죽고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요 3:7)은 신앙하는 태도와 그로 인한 결말이 하늘과 땅 만큼 다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날조되고 거짓된 자아(自我 ego), 왜곡되고 부풀려진 자아를 진짜 자기라 여기고 거기에 속아서 살아가는데, 스스로 거룩하다고 자신하는 신앙인일수록 이 날조되고 거짓된 자아는 더 강화됩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이 거짓된 상태가 고착되어 새로 태어나는 것에 실패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요 3:3), 들어갈 수도(요 3:5)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든 거짓된 상태를 깨기 위해 우리를 이끌어 마음의 사막에 직면하도록 하십니다. 우리를 마음의 사막으로 이끄는 도구는 상처나 병이나 경제적 위기일 수도 있고, 고요와 침묵 속의 성찰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막에 던져 넣으시고, 그 심연(深淵)에서 우리를 만나주실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보게 하심으로 그 동안 앞만 보고 달리는 것에 마음 빼앗겨 하나님과 분열되어 있던 지성과 감성과 의지, 즉 날조되고 거짓된 자아를 거두어들이고, 당신과 일치된 참 자아를 갖추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노력을 보게 됩니다.
먼저 구약성경은 나아만 장군을 보여줍니다. 그에 대한 저자의 소개가 재미있습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왕하 5:1). 드러난 나아만과 감춰진 나아만이 다른 것, 거기에 그의 치명적인 모순이 있었습니다. 그는 분노와 갈등을 거듭하던 끝에 마침내 장군의 위세 뒤에 감추어진 거짓된 자신을 내려놓고 더러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금으로써 새롭고 참된 존재로 거듭납니다(왕하 5:14). 복음서에서 전도를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은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라며 의기양양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시며, 정말 중요한 것은 드러난 외적 현상이 아니라 감추어진 내면의 복음화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고 당부합니다. 사람들은 타인을 보는 동안에는 자신에 대해 성찰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온유함으로 타인을 바로잡아 준 후에 '두려움으로 자신을 살펴보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간과하기 쉬운 자기성찰을 독려해 주는 귀한 가르침입니다. 서신서의 말씀을 계속 보면,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사도 바울은 거듭거듭 '스스로 속이지 말고 자신을 살필 것'을 당부합니다.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 갈 6:3-4a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갈 6:7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채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은 영적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속아서 살아가는데, 그런 상태로 무언가 심는다는 건 불행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심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있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각각의 결과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갈 6:8
당시 갈라디아 신자 중에는 유대인들의 삶을 모본으로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는 등 율법을 준수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런 행동이 육체를 위해 심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따라 육체에 희망을 심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완벽하게 따르지도 못하면서 구원을 이룬 것으로 스스로 속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자기 고백적입니다. 한때 자신도 육체를 신뢰했었습니다. 빌 3:4-6에서의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한때 그는 이 자기 확신에 너무 몰입해서 타인의 신앙을 이해하지 않던 자였습니다. 자신이 혈통에 있어서나, 율법에 있어서나, 학벌에 있어서 너무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를 만납니다(행 9:4). 그 충격적 체험은 그로 하여금,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행 9:8),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사흘을 보내게 했고(행 9:9), 그의 눈을 가린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게 했습니다(행 9:18). 뿐만 아니라 그는 아라비아 사막에 던져져(갈 1:16-17), 3년여 동안 자신을 새로이 바라보게 되는데, 오늘 고백은 그렇게 사막에 던져져 자신을 치열하게 성찰한 자로서 내린 결론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그 동안 자신이 가졌던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랑을 '육신을 따른 자랑'(고후 11:18)이라고 단정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과대 해석해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정은 먼저 내 안의 죄를 처절하게 인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나를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여정입니다. 스스로에 대해 속지 않고, 흙으로 돌아갈 육체의 한계성과 덧없는 나의 정신세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소망할 때, 마침내 주님 안에서 참 평화와 쉼을 얻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감추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초라한 나를 감추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고 우리를 불러내어 당신 앞에 정직하게 세우고 싶어 하십니다. 따라서 가장 '나다운 나'를 만날 수 있는 길은 내 안의 거짓 자아의 실체를 정직하게 대면해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아를 실현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본을 바울에게서 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갈 6:14
이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안에 성령이 임재하시고 나니까 '육신을 따른 자랑'처럼 무익한 것이 없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자랑스러운 것도 없었습니다. 장로 일리아스는 그의 격언집에서 "자부심이 만들어내는 것, 즉 자기 만족을 역겹게 여기는 사람들만 자부심이라는 가죽옷을 던져버린다" 고 했고, 토머스 머튼 역시 자신의 책에서 "깨지기 쉬운 껍질을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으로 여기고, 우리의 가면을 우리의 진정한 얼굴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진실을 파괴하면서까지 허구로 그것을 지키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머튼에 따르면 인간은 숙명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참 자아에게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 자신과의 진실한 만남이고, 내 안에 찍힌 예수의 흔적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이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민망한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사를 찾아온 나아만 장군의 모습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집에 당도할 때의 광경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 왕하 5:9
화려한 말들과 전차와 군대, 이 겉치장이 단지 병을 고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는 나아만 장군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에 대해 이렇게 귀띔합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 왕하 5:1
그의 겉치장 된 위엄 이면에서는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그를 내다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합니다(왕하 5:10). 그는 모욕감에 몸을 떱니다(왕하 5:11). 내면의 비참함이 표정에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는 살기 위해 순종합니다. 더러운 요단 강물에 그의 몸이 잠길 때, 그의 겉치장 된 자아가 함께 수장됩니다. 한 번, 두 번, 횟수를 거듭할 때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원죄가 그의 나병 껍데기와 함께 씻기어 나갑니다.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 왕하 5:14
그리스도 안에서, 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와 인간관계 속에서 내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심리기제를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강하게 보이려 노력하고, 똑똑하게 보이려 합니다. 어떤 이는 재산으로, 어떤 이는 학벌로, 어떤 이는 인맥으로, 어떤 이는 옷으로 겉치장을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자아상은 정확하게 인류가 가진 거짓 자아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이 거짓 자아가 요구하는 상(像)을 보여주기 위해 덕지덕지 껴입은 겉치장을 벗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욕구와 불미(不美)한 감정들을 사실 그대로 고백하며 예수님께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당신의 피로 우리를 씻어 참되고 건강한 자아를 회복시켜주십니다. 오늘 복음서에 보면 칠십 인을 세우시고 둘씩 짝 지어(눅 10:1), 평안을 빌어주고,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보내셨던 제자들이 기쁨에 가득 차 돌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 눅 10:17
제자들이 한껏 고무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귀신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주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능으로 그들은 귀신을 제어했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승리를 함께 기뻐해 주십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 눅 10:18, 19
하지만 이어서 주님은 보다 중요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 눅 10:20
본(本)과 말(末)을 혼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귀신들을 항복시킨 것도 기쁜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더 기뻐해야 할 일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일의 성취도 기뻐해야 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존재론적 성취'입니다. 사도 바울의 기쁨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자기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자기가 죽은 기쁨입니다(갈 6:14). 더욱이 자기 몸에 찍힌 예수의 흔적을 볼 때마다(갈 6:17), 그는 '예수의 흔적이 새겨진 자신'에 대해 기뻐했습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으며 우리가 진정으로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지난 6개월 동안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내 삶에도 감사하며 기뻐해야 하겠지만, 내 존재에 새겨진 십자가의 흔적, 내 몸에 흐르는 예수의 피로 인한 감사와 기쁨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과 더불어 성찬례에도 초대받았습니다. 이 성찬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 존재 안에는 나를 위해 찢기신 주님의 살이 차오르고, 나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가 흐릅니다. 이 기가 막힌 은총이 내 존재에 가득한데, 주님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희생하신 흔적이 내 존재에 새겨져 있는데, 재산이니, 학벌이니, 인맥이니 하는 섣부른 겉치장으로 그 소중한 은총을 가려서야 되겠습니까? 한 해의 절반지점을 막 돌아서는 오늘 말씀과 성찬을 마음의 사막으로 삼아, 겉치장에 왜곡된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 남은 반년을 참 사람으로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나의 재산이나 인맥이나 학벌이 곧 나라고 속고 있지 않은가?
② 나의 연약함을 대속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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