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주 하나님 형상이 깃들인 존재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사 65:1-9
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 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 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2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3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 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4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5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서 있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6 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7 너희의 죄악과 너희 조상들의 죄악은 한 가지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들의 행위를 헤아리고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 느니라 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사 람들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와 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 9 내가 야곱에게서 씨를 내며 유다에게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내가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 이 거기에 살 것이라
응송 | 시 42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서신 | 갈 3:23-29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 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 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 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 을 이을 자니라
복음 | 눅 8:26-39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 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 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 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 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 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 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 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 묵 상 | meditatio
① 눅 8:30을 묵상하십시오. 귀신 들려 무덤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 에게 이름을 물어주시는 예수님을 보며 무엇을 느끼십니까?
② 사 65:1, 2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을 구하지도, 찾지도, 이름을 부 르지도 아니하던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③ 갈 3:26-28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자세는 어떠한 것입니까?
■ 기 도 | Oratio
■ 묵상 나눔
하나님 형상이 깃들인 존재
사람 안에는 하나님 형상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을 '하나님의 모상(模像)'이라 하는 고백이 가능합니다. 본디 땅의 흙으로 지어져 육(肉)에 불과했던 사람에게 당신 숨결을 불어넣어주심으로써(창 2:7) 영적 존재가 되게 하신 것은,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를 창조자와 한 숨결로 호흡하게 하심으로써 당신과 뗄 수 없는 근본적 관계성 안으로 이끌어 들였다는 점에서 황홀한 신비였고, 가늠하기 어려운 은총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이 창조 이야기는 '신(神)의 영원성'과 '인간의 유한성'이 당연하게 구분되던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피조물 안에 창조자의 형상이 깃들일 수 있으며, 어떻게 사람이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은 고대 근동의 절대적 신관에 젖어있던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것이었겠습니다. 그만큼 사람 안에 깃들인 하나님 형상은 신비였고 은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사람이 이 은총에서 탈선하고 맙니다. 하나님 형상이 내 안에 깃들여, 단지 그분을 닮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 자리에 올라 선과 악의 기준을 움켜쥘 수 있다고 한(창 3:5) 악마의 유혹이 먹음직도, 보암직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기 때문입니다(창 3:1-6). 악마의 유혹에 빠진 사람은 다시 육으로 돌아갔으며, 그리하여 자기 안의 하나님 형상을 상실해버렸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다시금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보이는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보이는 육체를 입고 오심으로(요 1:14), 하나님을 볼 수 없어 따를 수도 없다던 사람들(요 14:8)이 당신을 눈으로 보고, 영접하고, 믿고, 따라서 삶으로써 하나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연약했습니다. 연약함은 그들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를 '감당하지 못할 지혜'(요 16:12)로 여기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또 다른 보혜사이시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聖靈)으로 강림하셔서 사람들 안에(요 14:17) 깃드시고, 사람들 위에(행 2:3) 거하심으로 사람이 다시금 육의 한계를 넘어 영적 존재로 자신을 쇄신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 애타는 노력은 우리에게 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사람 안에 당신 형상이 깃들여 있게 하고 싶어 하시는지, 그리고 사람 안에 하나님 형상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묻게 합니다. 하나님의 깊고 크신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다양한 하나님의 뜻 중에서 한 가지를 헤아려 보자면, 사람 안에는 그가 누구든 하나님 형상이 깃들여 있다는 진실을 알 때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고, 주변의 타인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게 되어, 그 '앎'에 걸맞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시선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알게 해줍니다. 먼저 복음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 눅 8:26, 27
예수님께서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내리셨을 때,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를 만나셨습니다. 그는 인간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벌거숭이 상태로 살았습니다. 그는 죽은 자들의 무덤들 틈에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채 그는 고립된 삶을 영위해 가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맞은편(opposite Galilee)이란 표현은 단지 지리(地理)를 의미하는 차원을 넘어 생명의 반대쪽(opposite life)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산 사람이었지만 생명의 반대편에서 무덤으로 상징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버젓이 살아있으면서도 비존재(non-Being)의 위협을 받는 것, 인간이면서도 비인간화 되어버린 현장을 성경은 저 갈릴리 반대편에서 보여줍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반대편에는 이렇게 비존재화의 위협과 소외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수많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이웃이라 여겨주었겠으며, 누가 이 사람의 이름을 물어주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름을 물어주십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 즉 | 눅 8:30
사람을 이름으로 불러준다는 것,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자기 이름을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이미 자기를 잃은 채 귀신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살펴보면 우리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 현대인들이 이런 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잃은 채 도시의 빌딩숲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 출세를 위해 앞 다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존재의 이유를 성찰하고, 삶의 의미를 찾기보다 영역 넓히는 것에 더 여념(餘念) 없어하는 사람들, '인간만이 자기를 물을 수 있다'고 하는데, 자기를 물을 마음의 여력조차 없는 사람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생명의 반대편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네가 누구냐'고,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과연 우리는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대답하게 될까요? 그리스도교 진리 안에서 인간을 한 마디로 집약하면 '하나님 형상을 닮은 존재', '하나님 형상을 품은 존재'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는 인간 이해는 결코 허용되지 않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육적 존재를 넘어 영적 존재로 살도록 쇄신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렇게 집요하리만치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 안에 하나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에 사활을 걸고 계십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도 우리는 그 하나님 마음의 단면을 봅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 사 65:1
여기 보면 하나님 형상을 상실한 사람의 상태가 세 종류의 모습으로 소개됩니다.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성서 주석가들은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이방인을 뜻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구하지도, 찾지도,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는 것에서 그들의 상태는 이미 정의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대하시는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이렇게 드러내 주십니다.
나에게 빌지도 않던 자의 청까지도 나는 들어주었고, 나를 찾지도 않던 자 또한 만나주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민족에게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해 주었다. | 사 65:1 공동번역
성경은 종종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장면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그 애타는 노력이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까요?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 사 65:2, 3
성경에서 '손을 편다'는 것은 초청을 뜻합니다. 잠 1:2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 하나님은 '자기 생각을 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자기 생각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그 길을 하나님은 '옳지 않은 길'이라 하셨고, 그런 이들을 '패역한 백성'이라 부르셨습니다. 자기를 잃고 무덤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형상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바로 패역함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돌이켜서, 잃어버린 당신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종일 손을 펼치고 계시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다시 복음서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귀신 들린 자를 회복시키시려는 예수님의 처방을 보시겠습니다.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 눅 8:32-37
산 사람이었지만 생명의 반대편에서 무덤으로 상징되는 삶을 살던 사람, 인간이면서 비인간화 되어버린 채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던 사람을 어떻게든 회복시키시기 위해 주님은 수많은 돼지 떼를 희생시키셨습니다. 그 어떤 경제적 회생을 감수하고라도 주님은 한 사람의 가치를 더 귀하게 여겨주셨습니다. 비록 귀신들려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지만, 그 안에 하나님 형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경제적 가치가 사람보다 귀했기에 예수님을 자기들의 동네에서 쫓아내 버리고 맙니다. 그런 면에서 귀신에게 점령당한 사람이나, 돈에게 점령당해 사람 귀함을 모르는 사람이나, 참된 자기를 잃고 있었다는 면에서 동일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반전을 봅니다.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 눅 8:38, 39
귀신에게 온 존재가 사로잡혀서 귀신이 하라는 일을 하던 사람에게 주님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시며 새로운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이후로 그의 존재와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 존재 안에는 하나님 형상이 거룩히 빛났고, 그의 전 삶은 하나님의 큰 일을 드러냈습니다. 무덤에서 죽은 자처럼 살던 사람이 진정으로 산 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참으로 사는 길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존재의 궁극적 실재를 보았고, 자기가 지향할 궁극적 삶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무덤을 떠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에 감싸여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존재의 위협, 그 무덤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반드시 만나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도록 자신을 개방하고, 마침내 우리를 점령하고 있던 망상에서 해방되어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거룩히 빛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큰 일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목적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갈 3:26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일어난 놀랍고도 신비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는 것, 그것보다 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완전한 선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든 자기를 증명하고, 더 많은 일의 성과를 내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증명해 내려는 노력은 번번이 존재의 허기만 더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참 행복으로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내면에서 체감하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사랑을 알아갈 뿐 아니라, 그 신비 속으로 깊이 자라도록 초청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자기 소명을 찾고, 받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초청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갈 3:26, 27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 그것이 우리의 정체입니다. 바울 당시 로마의 풍습에 따르면, 성년이 된 자는 성인식을 치를 때, 어린아이 시절의 옷을 벗어버리고, 어른이 입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권리와 의무와 더불어 성인으로서 시민권을 얻게 된 것을 기념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과거의 구습에 매였던 삶을 벗어버리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라 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삶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가르쳐 줍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갈 3:28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를 창조자와 한 숨결로 호흡하게 하심으로써 당신과 뗄 수 없는 근본적 관계성 안으로 이끌어 들였다는 사실이, 신(神)의 영원성과 인간의 유한성이 당연하게 구분되던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는 적잖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라고 서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같은 이유로 유대인과 헬라인이 하나이고, 종이나 자유인이 하나이고, 남자나 여자가 하나라는 바울의 말은,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도, 헬레니즘에 익숙한 사람들 입장에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쉽지 않은 일이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이 우리 안에도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한계를 넘어서서 예수님처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깃들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우리를 '하나님의 모상(模像)'이라 한다면, 자신을 대하는 마음도, 이웃을 대하는 자세도 그래서 달라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우리는 평생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신비 속으로 깊이 자라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아니하는 사람들을 향해 종일 손을 펴고 기다리시는 것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죽은 자들의 무덤 사이에서, 살았으나 죽은 자처럼 살던 귀신들린 사람을 찾아가 그의 이름을 물어봐 주시고, 그를 위해 수천 마리 돼지 떼를 아끼지 않은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왜 그러셨을 까요? 우리 안에 심어 놓은 하나님 형상이 반드시 지켜져야 했고, 회복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마음이 그러하듯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과 형제 안에 깃들인 하나님 형상을 소중히 여기고, 그 형상에 걸맞은 삶, 즉 하나님 형상이 거룩히 빛나는 삶을 살고, 하나님 형상이 담긴 형제를 아끼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자신과 이웃을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로 여기며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자신과 이웃 안에 깃든 하나님 형상을 보며 귀히 여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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