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성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잠 8:1-4, 22-31
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3 성문 곁과 문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 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 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응송 | 시 8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 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서신 | 롬 5:1-5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 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복음 | 요 16:12-15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 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 묵 상 | meditatio
① 잠 8:22-31을 묵상하십시오. 지혜는 언제부터 존재했으며, 지혜는 성부 하나님의 곁에서 무엇으로 존재했습니까?
② 요 16:12-14을 묵상하십시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어 디로 인도하십니까?
③ 롬 5:1, 2을 묵상하십시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에 게 주어지는 은총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묵상 나눔
삼위일체 - 하나님의 역동성
오늘은 성령강림절후 첫째 주일이자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력은 성령강림절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삼위일체주일이 교회력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삼위일체 신앙고백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이 삼위일체 교리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도 없습니다. 현대 신학자 폴 틸리히는 삼위일체 신앙을 '하나님의 역동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했습니다. 단일신론자(Unitarian)나 유대교의 유일신론은 하나님의 활동을 한 측면에서만 바라보지만, 삼위일체 신앙은 하나님의 활동을 여러 측면에서 보기에 역동적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위르겐 몰트만 등의 신학자는 초대교회에서 사용되었던 헬라어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합니다.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란 '상호순환', '상호침투', '상호내재' 등으로 번역되는데,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다른 위격 안에 포함되고 내주하며 존재하는 어떤 상황이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경우 페리코레시스는 상호순환의 뜻을 지닙니다. 이 의미를 삼위일체 신앙고백에 적용하면,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들 안에 존재하고, 다른 두 위격들을 둘러싸며, 다른 두 위격들과 똑 같은 영역을 차지하고, 다른 두 위격들을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페리코레시스는 활동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은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들과 더불어, 동시에 다른 위격들 속으로 상호침투하거나 상호 얽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페리코레시스는 하나님의 세 위격들에 독특하게 적용되는데, 특히 세 위격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의 위격은 셋이지만 서로 동등한 상호침투 내지 상호교류를 통해 하나라는 전체성을 항상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1=3이 아니라, 1+1+1=1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에서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빌립이 요구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b).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말씀은 '인간 예수와 하나님이 하나'라는 의미인데,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은 그분의 인격 안에서 공존하며 일치됩니다. 이때 신성과 인성이 인격 안에서 너무 깊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한 본성의 속성들은 다른 본성의 속성들과 상호 교환됩니다. 즉 신성은 인성을 입고, 신성과 인성 각각은 한분이신 하나님 본체의 전체성을 가짐으로써 진정한 페리코레시스를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 '내가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 여기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부와 성자가 일치를 이루도록 돕는 '사랑과 일치의 능력'은 바로 성령님의 몫이겠습니다. 성령님은 성자와 성부께서 교통할 뿐 아니라 생명의 결합을 이루는 통로 역할을 하십니다. 우리가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단지 개념으로 이 교리를 수긍하는 것을 넘어 모든 신앙의 행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성 안에서 이룬다는 뜻이겠습니다. 즉 성령을 통하여 성자께서 성부와 하나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성령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대개의 역사학자들은 주후 215년경에 쓰인 히폴리투스의 '사도적 전통(Apostolic Tradition)'을 원시 형태로 기록된 사도신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후 325년에 확정된 니케아신경은 그리스도교에서 최초로 공인한 신경입니다. 이 니케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면서도 '하늘에 오르사 성부의 우편에 앉으셨으며'라고 고백함으로서,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각각 다른 분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플신경에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포함됩니다.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사오니, 그는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되셨으며…" 이 성령에 관한 항목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성령님 또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주(主)이시지만, 그러나 성부와 성령이 같은 하나님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고백하는 '한 분 하나님'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삼위일체 신학을 형성시킨 교부들 즉 아타나시우스를 비롯한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三位)'께서는 상호침투와 공재(共在)를 통해 거룩한 '일체(一體)'를 형성하시는데, 이 '상호침투와 공재를 통해 일체를 이루신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고 지칭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한 분 하나님'의 역사 안에 항상 '세 분의 역사가' 함께 존재하고,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은 성부의 영광인 동시에 성자의 영광이고 또한 성령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사도들이 고백하고, 교부들이 보존해 온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는 고백 위에 우리 그리스도교가 세워져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하나님'으로서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만물 위에' 계시고, 성자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성령님은 보혜사로서 '만물 안에' 계십니다. 참된 지혜란 다름 아닌 이 사실을 깨닫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우리 존재와 삶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 역시 참된 지혜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 잠 8:1
여기서 잠언 저자가 언급한 지혜는 신적 지성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입니다. 터툴리아누스는 이 신적 지성 즉 말씀을 '제2의 위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요 1:14)를 생각할 때,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제2의 위격이신 지혜는 왜 소리 높여 사람을 부르는 걸까요? 어리석은 이들에게는 영특함을 터득하라고, 우둔한 이들은 마음을 깨치라고 부르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지혜가 말하는 영특함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과 지혜가 이룬 사역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잠언 저자는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 잠 8:22-26
여기서 잠언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이 지혜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잠언 저자는 순차적으로 설명합니다. 땅도 생기기 전에,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아직 산의 기초가 생기기도 전에, 지혜는 이미 태어났었으며, 거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합니다.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 잠 8:27-31
이렇게 성부 하나님은 지혜와 함께 땅과 바다와 산과 들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하신 것들을 함께 바라보며 기뻐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지혜로 사는 것이고, 그 사실을 믿는 것이 명철로 사는 것이고,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참된 신앙의 첫 걸음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롬 5:1, 2
구약성경에서 잠언 저자가 소개한 '하나님의 기쁨'은 지혜와 함께 땅과 바다와 산과 들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것들을 함께 바라보는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그렇다면 '우리의 기쁨'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갈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얻을 때입니다. 우리가 한때 하나님의 원수였던 마귀로 말미암아 마귀의 무기인 탐욕과 교만과 불순종으로 살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화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귀의 무기를 집어던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무기인 온유와 겸손으로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할 뿐 아니라 은혜와 영광까지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솔로몬의 온갖 영화가 들꽃 한 송이보다 못했다(마 6:29)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세속화해서 사치를 누린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세속화해서 왕궁을 지었고, 그 왕궁 안에서 화려한 옷을 지어입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의 화려한 왕궁과 의상에서 역설적이게도 하나님과의 불화와 그로 인해 그 존재에 깃들인 남루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주님은 그가 누린 화려함이 들에 피어있는 들꽃보다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들꽃의 아름다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햇볕과 비로 만족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지혜가 이루신 창조섭리에 온전히 자신을 맡긴 들꽃의 자태, 그 모습이 우리이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만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고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야 말로 영원한 지혜이고 궁극적인 지혜입니다. 이 지혜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무모하게 세상을 탐하지 않으며, 예수님만으로 충분히 행복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고난도 환난도 이 행복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행복을 얻으려면 우리가 통과해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 롬 5:3-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을 역설적이게도 '환난'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합니다. 환난이 어떻게 즐거울 수 있습니까? 환난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당장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만, 그 고통은 우리를 인내와 연단, 그리고 소망이라는 미덕으로 이끌어줍니다. 오리게네스는 로마서 주해에서 '인내는 영혼의 미덕 가운데 하나이므로 환난은 악이거나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라고 했고, 바실리우스는 인내를 운동선수가 영광을 얻기 위해 감내하는 음식의 절제나 훈련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고자 할 때, 사회는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을 반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즐거움은 역설적이게도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몰고 올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는 즐거움을 얻고자 할 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 바로 인내입니다. '인내'는 희랍어로 '휘포모네(ὑπομονή)'입니다. '최후까지 남는다.',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최후까지 인내하며 예수님처럼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들꽃이 누리는 소박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그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들꽃 한 송이에게 하나님께서 햇볕과 비를 주시듯, 예수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천상의 볕과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소망할 참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 요 16:12-14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를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온통 공포에 짓눌려서 그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실패로 인식되었고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완성되었고, 예수님의 기쁨도 우리의 즐거움도 거기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삼위일체 신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니케아 신조가 말하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와 함께 존재하며, 서로와 함께 경배되고 존중됩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의 위격적 독특성을 제외하고는 존중함으로써 모든 것을 공유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를 위해 존재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존재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존재하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들은 서로를 위하여 완전한 대리를 수행합니다. 그럼으로써 결국 '서로 안에서'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플로랜스 공의회의 고백을 소개합니다.
이 일치 때문에 아버지는 전적으로 아들 안에 있고, 성령 안에 있다. 그리고 아들은 전적으로 아버지 안에 있고, 전적으로 성령 안에 있다. 그리고 성령은 전적으로 아버지 안에 있고, 전적으로 아들 안에 있다."
그런데 주님은 더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존재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존재하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위해 존재하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애틋한 일치에 주님은 우리도 넣어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십니다. 그런 행복이 언제 찾아온다는 겁니까? 진리의 성령이 오신 날입니다(요 16:13). 그 날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즉 '상호순환', '상호침투', '상호내재'가 우리 모두들 안으로 확대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날 비로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동성이 우리 안에서 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감당치 못할 지혜'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세 위격이 동등하게 사랑으로 침투하고 교류함으로 일치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존재방식을 따라 우리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기쁨으로 보살피며, 이웃과 더불어 사랑으로 일치되기 위해 애쓰며, 지배와 억압이 있고, 폭력과 차별이 있는 세상에서 십자가의 지혜를 힘써 구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신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영성의 근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성이 미치지 않는 신앙이지 않은가?
②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성이 신앙과 삶에 나타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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