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7주 하늘 영광을 향해 오르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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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2-05-28 23:20
조회
1173
부활절 제7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사도행전 | 행 16:16-34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 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 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 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 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 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 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 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 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 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응송 | 97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 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서신 | 계 22:12-14, 16-17, 20-21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 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복음 | 요 17:20-26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 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 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 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 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 묵상 | meditatio
① 요 17:24절을 묵상하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누구이며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은 어떻게 얻은 영광입니까?
② 행 16:30, 33-34절을 묵상하십시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취한 행동은 그들에게 어떠한 영광으로 다가왔습니까?
③ 계 22:12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상은 각 사 람에게 무엇에 따라 갚아집니까?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오늘은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이자 '예수 승천 주일'입니다. 이마에 재를 칠하고 창 3:19절 말씀에 근거해 '사람은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며 시선을 땅에 두고서 사순절을 시작했던 날을 되돌아보면, 그 시선이 어느덧 부활을 통과해 하늘로 향하게 된 오늘 이 승천주일은 분명 존재의 새로운 차원이 우리를 위해 열렸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줍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죽은 자의 부활' 만큼이나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이 '승천(昇天)'입니다. 그럼에도 초대교회 이후로 우리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고 고백할 뿐 아니라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서 주님의 승천을 신앙고백 해 왔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심장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이 '생명이 죽음을 이긴' 복음 중의 복음인 사건이라면, 승천은 부활의 결말이요 성령강림의 단초가 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땅에 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하늘의 존재이고, 인간은 땅의 존재'라는 운명적 체념이 죽음에서 부활로 그리고 승천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극복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땅의 존재들'처럼 죽어서 땅에 장사됐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하늘나라에 불러올리신 까닭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리신 그 모습이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해야만 할 '새로운 인류'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다시금 이루시는 일이었습니다. 본시 땅은 하나님의 낙원이었고, 사람은 그 낙원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살도록 초대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낙원도 하나님의 형상도 다 상실해버리고 말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아담을 대신하여 사탄의 유혹을 다시 이겨내시고 죽음마저 이겨내고 부활하시고, 마침내 하늘로 승천하심으로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과 낙원을 우리에게 되찾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부활절 일곱째 주일'과 '승천주일'을 맞아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하여, 하늘로 가슴 벅차게 이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하늘'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하늘이란 창조된 우주의 물리적 공간이지만,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 당신의 세계를 가리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입으로 '하늘은 나의 보좌'(사 66:1)라고 밝히신 바 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에 의하면 하늘은 '영육을 창조하신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오직 한 분이신 창조자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하늘을 '인간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엄청난 신비'라고 고백했고, 니콜라우스 바실리아디스는 그 공간을 물질적 개념이 아닌 영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으며,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은 그곳을 '정신적인 곳'으로 소개하며 따라서 그곳에서는 '정신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며 활동한다' 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그곳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과 함께(요 1:1) 계시던 곳이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하셨을 때의 바로 그 낙원이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하늘은 주로 '하나님 나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뜻하는 그리스어 '바실레이아(βασλεία)'는 공관복음 안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로 자리 잡고 있으며, 예수님의 메시지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지 않는 자는 '고향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만물에게 의와 생명, 평화와 자유, 진리를 가져다주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은 배타적이지 않고 포괄적'이라며, 하나님 나라의 약속은 세상을 향한 사랑의 파송의 근거가 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곳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로 초대받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바로 이 영광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복음서 역시 13장에서 17장까지 이어지는 '고별설교'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오늘 말씀은 그 고별설교를 마무리하며 성부께 드리는 기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주님의 이 기도는 중보기도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1절-5절까지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함으로서, 땅에서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려드렸듯이(요 17:4), 창조 이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을 아버지 앞에서 얻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요 17:5). 예수님의 이 기도는 이루어졌을까요?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 예수님의 기도는 영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6절-19절까지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께 주신 말씀들을 제자들에게 주었다시며(요 17:8),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셔서(요 17:11) 아버지 우편에 앉아 얻으신 당신의 그 영광과 기쁨이 제자들 안에도 충만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20절-26절까지는 그 제자들로 인해 복음을 전해들은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서의 말씀인데, 제자들로 인해 복음을 전해들은 1세기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기도가 되겠습니다. 주님은 두 가지를 기도합니다. 하나는 '성도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고, 하나는 그럼으로써 '성부와 성자 안에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는 영광을 얻으셨듯이, 우리도 '땅의 존재'라는 운명적 체념을 뛰어넘어 마침내 하늘에 올라 '성부와 성자 안에' 있는 그 영광을 얻기를 주님께서 간절하게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 기도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 '어떻게' 때문에 주님은 이렇게 기도를 이어가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눈 여겨 보게 되는 것이 '내게 주신 영광'이라는 표현입니다. 요 13:31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그러면 '내게 주신 영광' 즉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주신 영광'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그 '영광'이 무엇이기에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준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 라고 말씀하신 13:31절 앞뒤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봐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을 아셨습니다(요 13:1a). 즉 당신에게 닥쳐올 수난과 죽음을 감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그 상황에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고(요 13:1b),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두르신 수건으로 발을 닦아주셨습니다(요 13:4, 5). 반면 마귀는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불어넣었는데(요 13:2), 그래서 주님은 유다가 당신을 팔 것을 예고하시고(요 13:21), 이어서 베드로는 당신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십니다(요 13:31). 그러니까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지만, 정작 지금 주님은 배반과 배신의 한 가운데에 끼여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영광일 수 있겠습니까? 불사하시는 분께서 죽을 운명에 처해지고, 영원하신 분께서 한시적 운명에 처해지는 그것이 어떻게 영광일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영광이 아닌 치욕을 맞이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당신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어리석은 길, 미련한 길, 치욕의 길입니다.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으며, 유대인에게는 무능한 길입니다. 세상 영광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이기에 알면서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며, 발을 씻으시며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셨기에 '주님의 영광'은 '세상 영광'과 달랐습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세상 영광과 비교되는 이 주님의 영광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요한의 표현은 역설의 최고점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하던 헬라 세계에서 '말씀(로고스)'은 거룩하고, 존귀한 것이었고 '육체(사르크스)는 속되고 무가치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은 거룩하고 존귀한 존재가 속되고 무가치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추락한 사건, 거룩이 세속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건, 그것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우리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영광은 낮아지는 영광, 비우고 섬기고 고난당하는 영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이루는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아버지의 일을 완성하시고 "내가 다 이루었다"며 숨을 거두셨습니다(요 19:30).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과 같은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엄습한 죽음 앞에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2b-15) 왜 당신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행하기를 원하신 걸까요? 그래야만 예수님께서 받으신 영광이 우리에게도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형제의 발을 닦아줄 때, 주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여기에 주님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종이 되어 형제를 섬김으로 마침내 우리들 가운데 이루어진 일치 속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주신 그 영광을 우리들도 볼 수 있기를 소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주님의 이 기도가 사도들에게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빌립보에서 기도하는 곳을 찾던 바울과 실라는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자 돈벌이가 끊어진 주인들이 화가 나 바울과 실라를 고발해 깊은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행 16:22, 23). 그런데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의 모습을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흔들리고, 문이 열리고, 죄수들을 묶어 둔 쇠사슬이 풀어집니다. 간수들이 자다가 깨서 죄수들이 도망갔다고 생각하고 칼을 꺼내 자살을 하려는데, 바울이 소리를 지릅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행 16:28) 간수들이 그만 감동하고 맙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가 밖으로 데리고 나가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이때 그들이 전한 메시지를 보십시오.
그날 밤 간수는 그들을 데려다 맞은 상처를 씻어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습니다(행 16:33).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과 실라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참된 영광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해야 할 '새로운 인류'의 모습인 것이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 형상대로 창조하셨던 창조의 본래목적을 마침내 회복한 모습입니다. 이런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모습이 마침내 내가 도달할 영광스러운 미래임을 알고, '땅의 존재'라는 운명적 체념을 뛰어넘어 '하늘의 존재'로 살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형제들의 발을 닦아주는 삶이고, 바울과 실라처럼 타인의 목숨을 배려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모습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드리운 모습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그런 신자를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안에 머무르며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겨가는 자녀에게 주님은 속히 오셔서 상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런 영광이 진정한 영광이고, 그리스도인들이 소망할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삶을 아름답게 해야 합니까? 이런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이 영광을 손꼽아 기다려온 시인은 오늘 응송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악을 미워해야 할까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영혼이 보전된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빛을 뿌려주시고, 기쁨을 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이 기쁨을 소망하며 온통 하늘에 시선을 둔 성도라면 어떻게 달리 살 수 있겠습니까? 이 기쁨을 소망한 자는 날마다 부활하여 하늘로, 하늘로 승천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땅의 존재가 아닌 하늘의 존재이며, 무덤이 아닌 승천을 향해 가는 존재입니다. 박경리는 '우주 만상 속의 당신'이라는 시에서, 내 영혼이 뱀처럼 배를 깔고 갈밭을 헤맬 때, 당신께서는 산마루 헐벗은 바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며 이렇게 자책했습니다.
내 영혼이 뱀처럼 배를 깔고 갈밭을 헤매고 있다면, 설사 거기서 주님 없이 얻는 그 어떤 성취가 있다 한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주 만상 속에 계셔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께로 가서 그분의 영광을 공유할 때, 거기에 참된 기쁨도 있지 않겠습니까? 한 발은 하늘을 향해 가고 있지만, 한 발은 사파(蛇巴)에 묻고 있는 삶이라면 이제는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한 수난과 죽음을 고통 속에 감내하시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리신 주님의 그 모습이 내가 도달해야만 하는 참 사람의 모습이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얻으신 그 영광이 내가 얻어야 할 참된 영광임을 깨달아 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 형상으로 살아냄으로써 하나님께서 빛을 뿌려주시고, 기쁨을 뿌려주시는 복된 여정을 걸어가시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세상 영광을 구하며 세속인들처럼 갈밭을 헤매고 있지 않은가?
② 주께서 주시는 영광을 구하며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사도행전 | 행 16:16-34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 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 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 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 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 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 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 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 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 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응송 | 97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 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서신 | 계 22:12-14, 16-17, 20-21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 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복음 | 요 17:20-26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 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 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 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 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 묵상 | meditatio
① 요 17:24절을 묵상하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누구이며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은 어떻게 얻은 영광입니까?
② 행 16:30, 33-34절을 묵상하십시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취한 행동은 그들에게 어떠한 영광으로 다가왔습니까?
③ 계 22:12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상은 각 사 람에게 무엇에 따라 갚아집니까?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하늘 영광을 향해 오르는 삶
오늘은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이자 '예수 승천 주일'입니다. 이마에 재를 칠하고 창 3:19절 말씀에 근거해 '사람은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며 시선을 땅에 두고서 사순절을 시작했던 날을 되돌아보면, 그 시선이 어느덧 부활을 통과해 하늘로 향하게 된 오늘 이 승천주일은 분명 존재의 새로운 차원이 우리를 위해 열렸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줍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죽은 자의 부활' 만큼이나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이 '승천(昇天)'입니다. 그럼에도 초대교회 이후로 우리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고 고백할 뿐 아니라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서 주님의 승천을 신앙고백 해 왔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심장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이 '생명이 죽음을 이긴' 복음 중의 복음인 사건이라면, 승천은 부활의 결말이요 성령강림의 단초가 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땅에 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하늘의 존재이고, 인간은 땅의 존재'라는 운명적 체념이 죽음에서 부활로 그리고 승천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극복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땅의 존재들'처럼 죽어서 땅에 장사됐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하늘나라에 불러올리신 까닭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리신 그 모습이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해야만 할 '새로운 인류'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다시금 이루시는 일이었습니다. 본시 땅은 하나님의 낙원이었고, 사람은 그 낙원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살도록 초대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낙원도 하나님의 형상도 다 상실해버리고 말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아담을 대신하여 사탄의 유혹을 다시 이겨내시고 죽음마저 이겨내고 부활하시고, 마침내 하늘로 승천하심으로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과 낙원을 우리에게 되찾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부활절 일곱째 주일'과 '승천주일'을 맞아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하여, 하늘로 가슴 벅차게 이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하늘'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하늘이란 창조된 우주의 물리적 공간이지만,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 당신의 세계를 가리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입으로 '하늘은 나의 보좌'(사 66:1)라고 밝히신 바 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에 의하면 하늘은 '영육을 창조하신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오직 한 분이신 창조자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하늘을 '인간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엄청난 신비'라고 고백했고, 니콜라우스 바실리아디스는 그 공간을 물질적 개념이 아닌 영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으며,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은 그곳을 '정신적인 곳'으로 소개하며 따라서 그곳에서는 '정신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며 활동한다' 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그곳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과 함께(요 1:1) 계시던 곳이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하셨을 때의 바로 그 낙원이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하늘은 주로 '하나님 나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뜻하는 그리스어 '바실레이아(βασλεία)'는 공관복음 안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로 자리 잡고 있으며, 예수님의 메시지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지 않는 자는 '고향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만물에게 의와 생명, 평화와 자유, 진리를 가져다주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은 배타적이지 않고 포괄적'이라며, 하나님 나라의 약속은 세상을 향한 사랑의 파송의 근거가 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곳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로 초대받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바로 이 영광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요 17:20, 21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복음서 역시 13장에서 17장까지 이어지는 '고별설교'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오늘 말씀은 그 고별설교를 마무리하며 성부께 드리는 기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주님의 이 기도는 중보기도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1절-5절까지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함으로서, 땅에서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려드렸듯이(요 17:4), 창조 이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을 아버지 앞에서 얻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요 17:5). 예수님의 이 기도는 이루어졌을까요?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 예수님의 기도는 영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6절-19절까지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께 주신 말씀들을 제자들에게 주었다시며(요 17:8),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셔서(요 17:11) 아버지 우편에 앉아 얻으신 당신의 그 영광과 기쁨이 제자들 안에도 충만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20절-26절까지는 그 제자들로 인해 복음을 전해들은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서의 말씀인데, 제자들로 인해 복음을 전해들은 1세기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기도가 되겠습니다. 주님은 두 가지를 기도합니다. 하나는 '성도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고, 하나는 그럼으로써 '성부와 성자 안에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는 영광을 얻으셨듯이, 우리도 '땅의 존재'라는 운명적 체념을 뛰어넘어 마침내 하늘에 올라 '성부와 성자 안에' 있는 그 영광을 얻기를 주님께서 간절하게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 기도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 '어떻게' 때문에 주님은 이렇게 기도를 이어가십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 요 17:22
우리가 여기서 눈 여겨 보게 되는 것이 '내게 주신 영광'이라는 표현입니다. 요 13:31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그러면 '내게 주신 영광' 즉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주신 영광'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그 '영광'이 무엇이기에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준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 라고 말씀하신 13:31절 앞뒤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봐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을 아셨습니다(요 13:1a). 즉 당신에게 닥쳐올 수난과 죽음을 감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그 상황에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고(요 13:1b),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두르신 수건으로 발을 닦아주셨습니다(요 13:4, 5). 반면 마귀는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불어넣었는데(요 13:2), 그래서 주님은 유다가 당신을 팔 것을 예고하시고(요 13:21), 이어서 베드로는 당신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십니다(요 13:31). 그러니까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지만, 정작 지금 주님은 배반과 배신의 한 가운데에 끼여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영광일 수 있겠습니까? 불사하시는 분께서 죽을 운명에 처해지고, 영원하신 분께서 한시적 운명에 처해지는 그것이 어떻게 영광일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영광이 아닌 치욕을 맞이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당신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어리석은 길, 미련한 길, 치욕의 길입니다.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으며, 유대인에게는 무능한 길입니다. 세상 영광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이기에 알면서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며, 발을 씻으시며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셨기에 '주님의 영광'은 '세상 영광'과 달랐습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세상 영광과 비교되는 이 주님의 영광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요한의 표현은 역설의 최고점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하던 헬라 세계에서 '말씀(로고스)'은 거룩하고, 존귀한 것이었고 '육체(사르크스)는 속되고 무가치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은 거룩하고 존귀한 존재가 속되고 무가치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추락한 사건, 거룩이 세속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건, 그것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우리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영광은 낮아지는 영광, 비우고 섬기고 고난당하는 영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이루는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아버지의 일을 완성하시고 "내가 다 이루었다"며 숨을 거두셨습니다(요 19:30).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과 같은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엄습한 죽음 앞에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2b-15) 왜 당신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행하기를 원하신 걸까요? 그래야만 예수님께서 받으신 영광이 우리에게도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형제의 발을 닦아줄 때, 주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 요 17:24
여기에 주님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종이 되어 형제를 섬김으로 마침내 우리들 가운데 이루어진 일치 속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주신 그 영광을 우리들도 볼 수 있기를 소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주님의 이 기도가 사도들에게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빌립보에서 기도하는 곳을 찾던 바울과 실라는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자 돈벌이가 끊어진 주인들이 화가 나 바울과 실라를 고발해 깊은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행 16:22, 23). 그런데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의 모습을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 행 16:25
그런데 이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흔들리고, 문이 열리고, 죄수들을 묶어 둔 쇠사슬이 풀어집니다. 간수들이 자다가 깨서 죄수들이 도망갔다고 생각하고 칼을 꺼내 자살을 하려는데, 바울이 소리를 지릅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행 16:28) 간수들이 그만 감동하고 맙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가 밖으로 데리고 나가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이때 그들이 전한 메시지를 보십시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 행 16:31
그날 밤 간수는 그들을 데려다 맞은 상처를 씻어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습니다(행 16:33).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과 실라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참된 영광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해야 할 '새로운 인류'의 모습인 것이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 형상대로 창조하셨던 창조의 본래목적을 마침내 회복한 모습입니다. 이런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모습이 마침내 내가 도달할 영광스러운 미래임을 알고, '땅의 존재'라는 운명적 체념을 뛰어넘어 '하늘의 존재'로 살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형제들의 발을 닦아주는 삶이고, 바울과 실라처럼 타인의 목숨을 배려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모습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드리운 모습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그런 신자를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 계 22:12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안에 머무르며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겨가는 자녀에게 주님은 속히 오셔서 상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런 영광이 진정한 영광이고, 그리스도인들이 소망할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삶을 아름답게 해야 합니까? 이런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이 영광을 손꼽아 기다려온 시인은 오늘 응송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 시 97:10, 11
왜 그리스도인들은 악을 미워해야 할까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영혼이 보전된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빛을 뿌려주시고, 기쁨을 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이 기쁨을 소망하며 온통 하늘에 시선을 둔 성도라면 어떻게 달리 살 수 있겠습니까? 이 기쁨을 소망한 자는 날마다 부활하여 하늘로, 하늘로 승천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땅의 존재가 아닌 하늘의 존재이며, 무덤이 아닌 승천을 향해 가는 존재입니다. 박경리는 '우주 만상 속의 당신'이라는 시에서, 내 영혼이 뱀처럼 배를 깔고 갈밭을 헤맬 때, 당신께서는 산마루 헐벗은 바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며 이렇게 자책했습니다.
그렇지요.
진작에 내가 갔어야 했습니다.
당신 곁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찔레 넝쿨을 헤치고
피 흐르는 맨발로라도
백발이 되어
이제 겨우 당도하니
당신은 아니 먼 곳에 계십니다.
절절히 당신을 바라보면서도
아직
한 발은 사파에 묻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내 영혼이 뱀처럼 배를 깔고 갈밭을 헤매고 있다면, 설사 거기서 주님 없이 얻는 그 어떤 성취가 있다 한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주 만상 속에 계셔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께로 가서 그분의 영광을 공유할 때, 거기에 참된 기쁨도 있지 않겠습니까? 한 발은 하늘을 향해 가고 있지만, 한 발은 사파(蛇巴)에 묻고 있는 삶이라면 이제는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한 수난과 죽음을 고통 속에 감내하시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리신 주님의 그 모습이 내가 도달해야만 하는 참 사람의 모습이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얻으신 그 영광이 내가 얻어야 할 참된 영광임을 깨달아 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 형상으로 살아냄으로써 하나님께서 빛을 뿌려주시고, 기쁨을 뿌려주시는 복된 여정을 걸어가시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세상 영광을 구하며 세속인들처럼 갈밭을 헤매고 있지 않은가?
② 주께서 주시는 영광을 구하며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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