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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제5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5-14 13:11
조회
865
부활절 제5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사도행전 | 행 11:1-18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 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8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 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 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 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 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 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응송 | 시 148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서신 | 계 21:1-6a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 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 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 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복음 | 요 13: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 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3:34, 35을 묵상하십시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께 영광이 임하 셨다면, 제자들에게는 어느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까?
② 행 11:5-18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시작되고 제자들에게 명령 된 사랑의 계명은 어디로 확대되었습니까?
③ 계 21:1을 묵상하십시오. 사랑의 계명과 하나님의 영광이 완성된 세 계를 보고 사도 요한은 무엇을 보았다고 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안톤 슈낙(Anton Schnack)이라는 작가가 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수필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챡인데, 그중 몇몇 글들이 제 가슴에 남아있어서 가끔씩 들추어 보곤 합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소행이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不眠)의 밤을 가져오게 했는지 모른다."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 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하지만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애를 태우셨던 것이다."
지금도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저린 것을 보면, 저로 인해 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며 애를 태우셨을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저 역시 가슴에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청년주일이기도 한데, 우리 청년들은 부모님으로 하여금 불면의 밤을 보내시게 한 어떤 소행(所行)들이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부모의 마음에 걱정을 끼치게 하는 행동은 무슨 대단한 만행(蠻行)을 저지르는 것만은 아닙니다. 일상에서 보이는 사소한 행동들 하나하나가 부모님들 마음에 기쁨을 드릴 때도 있고, 불면의 밤을 보내시게 할 때도 있습니다. 일상에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마음도 그러셨습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때로 착잡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이 많이 포착됩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도 그중 하나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있기 전, 그러니까 같은 요한복음 13장 안에서 1절에 보면 우리가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말씀 하나가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침내 다가온 죽음을 앞두고 주님은 더 애틋하게 제자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들을 보면 제자들의 마음은 주님과는 사뭇 달랐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당신의 죽음을 알고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마음과 너무 달랐던 유다의 속내에 대한 요한의 고발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장면이 그려지는데, 그런 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주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 15). 나머지 제자들은 유다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주님이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만큼 그들의 소행이 성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단한 여정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을 때, 적어도 주님의 제자라면 스스로 종의 위치에서 대야에 물을 받아와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던지, 그렇게까지 못하겠으면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물과 수건이라도 준비해놓던지 해야 할 텐데,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선뜻 종이 하는 그 일을 자기가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께서 심령이 괴로워하시면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21) 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그려지고, 그 증표로서 유다가 '적신 떡 조각'을 받고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장면(요 13:30)이 요한에 의해 매우 극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있은 후에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8). 예수를 팔아넘기는 일에는 유다의 이름이, 예수를 부인하는 일에는 베드로의 이름이 거명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평범한 일상에서가 아닌, 제자들의 이기심과 소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민망한 상황 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민망한 상황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받으실 영광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제자들의 상태를 먼저 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인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있고, 그중 하나는 예수를 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베드로는 곧 예수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둠을 향해 나간 유다는 곧장 산헤드린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예수를 넘길 방도를 모의할 것이고, 그로 인해 예수의 체포에는 속도가 붙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임박해 오는 당신의 수난을 바라보며 주님은 구속사역의 완성의 때를 보는 것이며, '지금'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수난은 일시적으로 사탄의 승리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주님은 당신께서 받으실 영광으로 여겼고, 당신의 영광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지금' 받았다고 선언하시는 영광에 대해 숙고하게 해줍니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이 영광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신성에 참여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영광을 받았다"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이루실 부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긴밀하게 일치를 이루고 계심을 봅니다. 성부는 성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고, 성자는 성부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이 영광은 단지 그것만을 목적으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받으실 영광은 철저하게 십자가에서 당하실 수난과 죽음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로 이해 완성될 우리 구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당하실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며, 그로 인해 성취될 인류의 구원을 희망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당신 희생이 가져올 결과를 바라보았기에 주님은 십자가를 자신의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희생에 시선을 두지 않고 인류의 구원만을 가슴에 열망하며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 마음을 우리는 공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 주님의 희망이 시작되는 시점을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여기에서 '그'는 유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당하실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로 인해 받을 영광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굳이 그 말씀을 '유다가 나간 후에'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가 있는 동안에는 예수 공동체가 진정한 영광을 향해 나아갈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일행이 중요한 갈림길에 설 때마다 번번이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을 기억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마리아가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사건이었습니다(요 12:3). 그때 유다가 역정을 내며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속내는 가난한 사람이 아닌 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에서 살아야 할 사람에게 있었다면, 유다의 관심은 철저하게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고, 주님은 그를 굳이 설득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유다는 '자기 생각'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님 반대편 어둠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신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신자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어떤 사람에게 이 영광이 주어질까요? 주님과 생각과 지향이 같은 사람입니다. 주님과 같아야 할 생각과 지향, 그것을 주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렇게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그런데 왜 주님은 이미 있는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 이유를 알게 해 주는 중요한 단서가 이어지는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계명이 '새 계명'인 이유는 그것이 명령으로만 주어지지 않고, 예수님께서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것이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우리 모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상상하는 것 말고는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정확하게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상상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도 모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고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인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도 예수님께서 생생하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 15)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이웃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실 이 말씀은 레위기에서 말씀하신 '네 자신과 같이'를 넘어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신보다 더'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형제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을 향한 강력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 사랑을 말할 때, 착하게 살고, 양심적으로 사는 윤리적 노력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일치하려는 영적 노력에 더 무게를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입니다. 이때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 현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알아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그 때, 우리에게 비춰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사랑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느 날 유대인들에게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고넬료에게 세례를 준 사람이 베드로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간 것도, 그들의 집에 들어간 것도, 그들과 함께 식사한 것도, 유대인의 법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제히 베드로를 비난했고, 베드로는 그 일에 대해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욥바에서 자신이 본 환상을 소개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기도를 하다가 환상을 보았는데,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부정한 짐승들인데 "베드로야,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자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일이 세 번 있고 나서 세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왔는데, 그들은 베드로를 초청해서 세례를 받기위해 고넬료가 심부름을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에 가서, 그와 가족들에게 세례를 주었더니 성령이 처음 제자들에게 내리시던 그대로 그들에게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난하던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가 마침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마침내 이방 세계에로까지 확대된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신비가 보이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사랑하셨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질 위대한 결과들을 보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사랑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랑을 이방 세계에까지 주었고, 하나님의 영광은 이방인들 위에서도 마침내 빛났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그랬듯이 이방인들 위에도 임재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신비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비춰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이루어진 세계,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세계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할까요? 하나님을 애태우게 만드는 우리의 소행은 어떤 것들일까요?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나의 마음, 예수님의 지향과 다른 나의 지향,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보시고, 자신의 영광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일지라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시며 당신 죽음을 통한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의 이 말씀이 내가 살아가야 할 모든 삶의 기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알아본다면 그것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형제를 사랑하는 기준이 내 판단에 한정되어 있지 않은가?
②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나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알아보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사도행전 | 행 11:1-18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 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8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 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 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 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 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 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응송 | 시 148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서신 | 계 21:1-6a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 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 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 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복음 | 요 13: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 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3:34, 35을 묵상하십시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께 영광이 임하 셨다면, 제자들에게는 어느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까?
② 행 11:5-18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시작되고 제자들에게 명령 된 사랑의 계명은 어디로 확대되었습니까?
③ 계 21:1을 묵상하십시오. 사랑의 계명과 하나님의 영광이 완성된 세 계를 보고 사도 요한은 무엇을 보았다고 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안톤 슈낙(Anton Schnack)이라는 작가가 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수필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챡인데, 그중 몇몇 글들이 제 가슴에 남아있어서 가끔씩 들추어 보곤 합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소행이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不眠)의 밤을 가져오게 했는지 모른다."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 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하지만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애를 태우셨던 것이다."
지금도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저린 것을 보면, 저로 인해 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며 애를 태우셨을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저 역시 가슴에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청년주일이기도 한데, 우리 청년들은 부모님으로 하여금 불면의 밤을 보내시게 한 어떤 소행(所行)들이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부모의 마음에 걱정을 끼치게 하는 행동은 무슨 대단한 만행(蠻行)을 저지르는 것만은 아닙니다. 일상에서 보이는 사소한 행동들 하나하나가 부모님들 마음에 기쁨을 드릴 때도 있고, 불면의 밤을 보내시게 할 때도 있습니다. 일상에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마음도 그러셨습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때로 착잡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이 많이 포착됩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도 그중 하나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있기 전, 그러니까 같은 요한복음 13장 안에서 1절에 보면 우리가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말씀 하나가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침내 다가온 죽음을 앞두고 주님은 더 애틋하게 제자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들을 보면 제자들의 마음은 주님과는 사뭇 달랐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당신의 죽음을 알고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마음과 너무 달랐던 유다의 속내에 대한 요한의 고발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장면이 그려지는데, 그런 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주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 15). 나머지 제자들은 유다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주님이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만큼 그들의 소행이 성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단한 여정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을 때, 적어도 주님의 제자라면 스스로 종의 위치에서 대야에 물을 받아와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던지, 그렇게까지 못하겠으면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물과 수건이라도 준비해놓던지 해야 할 텐데,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선뜻 종이 하는 그 일을 자기가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께서 심령이 괴로워하시면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21) 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그려지고, 그 증표로서 유다가 '적신 떡 조각'을 받고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장면(요 13:30)이 요한에 의해 매우 극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있은 후에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8). 예수를 팔아넘기는 일에는 유다의 이름이, 예수를 부인하는 일에는 베드로의 이름이 거명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평범한 일상에서가 아닌, 제자들의 이기심과 소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민망한 상황 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민망한 상황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받으실 영광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 요 13:31
제자들의 상태를 먼저 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인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있고, 그중 하나는 예수를 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베드로는 곧 예수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둠을 향해 나간 유다는 곧장 산헤드린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예수를 넘길 방도를 모의할 것이고, 그로 인해 예수의 체포에는 속도가 붙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임박해 오는 당신의 수난을 바라보며 주님은 구속사역의 완성의 때를 보는 것이며, '지금'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수난은 일시적으로 사탄의 승리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주님은 당신께서 받으실 영광으로 여겼고, 당신의 영광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지금' 받았다고 선언하시는 영광에 대해 숙고하게 해줍니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이 영광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신성에 참여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영광을 받았다"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이루실 부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 요 13:32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긴밀하게 일치를 이루고 계심을 봅니다. 성부는 성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고, 성자는 성부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이 영광은 단지 그것만을 목적으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받으실 영광은 철저하게 십자가에서 당하실 수난과 죽음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로 이해 완성될 우리 구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당하실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며, 그로 인해 성취될 인류의 구원을 희망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당신 희생이 가져올 결과를 바라보았기에 주님은 십자가를 자신의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희생에 시선을 두지 않고 인류의 구원만을 가슴에 열망하며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 마음을 우리는 공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 주님의 희망이 시작되는 시점을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그가 나간 후에 | 요 13:31a
여기에서 '그'는 유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당하실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로 인해 받을 영광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굳이 그 말씀을 '유다가 나간 후에'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가 있는 동안에는 예수 공동체가 진정한 영광을 향해 나아갈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일행이 중요한 갈림길에 설 때마다 번번이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을 기억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마리아가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사건이었습니다(요 12:3). 그때 유다가 역정을 내며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속내는 가난한 사람이 아닌 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에서 살아야 할 사람에게 있었다면, 유다의 관심은 철저하게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고, 주님은 그를 굳이 설득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유다는 '자기 생각'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님 반대편 어둠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신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신자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어떤 사람에게 이 영광이 주어질까요? 주님과 생각과 지향이 같은 사람입니다. 주님과 같아야 할 생각과 지향, 그것을 주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 요 13:34a
그런데 사실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렇게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그런데 왜 주님은 이미 있는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 이유를 알게 해 주는 중요한 단서가 이어지는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요 13:34b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계명이 '새 계명'인 이유는 그것이 명령으로만 주어지지 않고, 예수님께서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것이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우리 모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상상하는 것 말고는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정확하게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상상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도 모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고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인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도 예수님께서 생생하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 15)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이웃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실 이 말씀은 레위기에서 말씀하신 '네 자신과 같이'를 넘어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신보다 더'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형제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을 향한 강력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 사랑을 말할 때, 착하게 살고, 양심적으로 사는 윤리적 노력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일치하려는 영적 노력에 더 무게를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입니다. 이때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 현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요 13:35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알아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그 때, 우리에게 비춰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사랑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 행 11:18
어느 날 유대인들에게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고넬료에게 세례를 준 사람이 베드로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간 것도, 그들의 집에 들어간 것도, 그들과 함께 식사한 것도, 유대인의 법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제히 베드로를 비난했고, 베드로는 그 일에 대해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욥바에서 자신이 본 환상을 소개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기도를 하다가 환상을 보았는데,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부정한 짐승들인데 "베드로야,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자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일이 세 번 있고 나서 세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왔는데, 그들은 베드로를 초청해서 세례를 받기위해 고넬료가 심부름을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에 가서, 그와 가족들에게 세례를 주었더니 성령이 처음 제자들에게 내리시던 그대로 그들에게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난하던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가 마침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마침내 이방 세계에로까지 확대된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신비가 보이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사랑하셨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질 위대한 결과들을 보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사랑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랑을 이방 세계에까지 주었고, 하나님의 영광은 이방인들 위에서도 마침내 빛났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그랬듯이 이방인들 위에도 임재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신비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비춰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이루어진 세계,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세계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 계 21:1-5a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할까요? 하나님을 애태우게 만드는 우리의 소행은 어떤 것들일까요?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나의 마음, 예수님의 지향과 다른 나의 지향,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보시고, 자신의 영광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일지라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시며 당신 죽음을 통한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의 이 말씀이 내가 살아가야 할 모든 삶의 기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알아본다면 그것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형제를 사랑하는 기준이 내 판단에 한정되어 있지 않은가?
②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나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알아보는가?
첨부파일 : 부활절-제5주-내가-너희를-사랑한-것-같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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