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4주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사도행전 | 행 9:36-43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 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 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응송 | 시 2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서신 | 계 7:9-17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 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 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 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 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 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복음 | 요 10:22-30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 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0:26, 27을 묵상하십시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양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② 행 9:36, 39을 묵상하십시오. 욥바의 여 제자 다비다는 예수님의 양 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았습니까?
③ 계 3:13-17을 묵상하십시오. '흰 옷 입은 자들'(13절) 즉 '예수님의 양들'에게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은 어떠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을 맡기시기 전에 외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그를 준비시키셨습니다. 먼저 주님은 그의 이름을 '시몬'에서 '베드로'로 바꾸어주셨습니다.(요 1:42)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말씀하시고(눅 5:4),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많이 잡히는 체험을 하게 하신 후에는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에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수난을 앞두신 밤, 겟세마네 동산에는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가 다 같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 중에 베드로만 콕 집어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막 14:37)며 나무라시고,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 32) 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 후에 다시 세 번 반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 "내 양을 치라"(요 21:16),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이것이 부활절 셋째 주일 복음서의 말씀인데, 이때 목자로서의 소명을 받은 베드로로 인해 전통적으로 교회는 매 해마다 그 다음 주일인 부활절 넷째 주일을 '선한 목자 주일'로 지키며 요한복음 10장을 묵상합니다.
그런데 해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력 가해의 복음서 말씀인 요 10:1-10에서는 "양으로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요 10:10) '양의 목자'로서의 예수님이 소개되고, 교회력 나해의 복음서 말씀인 요 10:11-18에서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로서의 예수님이 소개됩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력 다해의 복음서 말씀인 요 10:22-29에서는 분위기가 좀 달라집니다. 여기서는 '목자'가 아닌 '양'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는데, 주님은 '내 양'과 '내 양이 아닌 자들'을 구분하십니다. '내 양'과 '내 양이 아닌 자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와 '듣지도 따르지도 않는 자'(요 10:26, 27)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심층적으로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 요 10:22
수전절이란 BC 165년 유다 마카베오(Maccabeus)가 제정한 성전 봉헌 축제인 '하누카(חנוכה)'를 의미하는데, 하누카가 봉헌을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수전절을 봉헌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당시 안티오쿠스 4세는 이스라엘을 헬라화 시키기 위해 성전 제사를 폐지시키고,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할례와 안식일 규례를 금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헬라 성전이 되었으며, 그들은 제단에 죽은 돼지를 바쳤습니다. 이러한 성전모독은 경건한 유대인들을 자극했고, 그들의 분노는 마침내 독립투쟁으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마카베오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마카베오는 3년간의 전쟁 끝에 성전을 탈환하고 신실한 제사장들을 세워 성전을 정결케 했습니다. 그리고 겨울에 성전을 봉헌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기념하는 축제가 바로 '수전절' 즉 '하누카 축제'입니다. 수전절이 되면 8일 동안 매일 하나씩 하누카 촛대에 불을 밝히는데, 가운데 촛대에는 8일 동안 촛불을 밝혀두기 때문에 총 아홉 개의 촛불을 밝히게 되고, 그래서 수전절을 '빛의 절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이 빛의 절기를 지키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행각을 거니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대들듯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 요 10:24
당시 솔로몬의 행각이 서기관들을 가르치는 교육 장소로도 쓰였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서기관들을 시켜서 예수를 둘러싸고 거칠게 대들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의혹케 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아이로(αἴρω)'는 '들어 올리다', '빼앗아 가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왜 정식 신학교육을 받지도 않은 당신이 성전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가고 있느냐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라는 질문에는 예수 때문에 자기들의 권위가 도전받는 상황에 대한 불쾌감이 짜증스럽게 배여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리스도가 맞느냐'는 그들의 물음은 요한신학의 핵심적 주제이기도 합니다. 지금이 마카베오 혁명을 기념하는 축제기간이기 때문에 '당신이 메시아가 맞느냐'는 그들의 질문이 더 예민하게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굉장히 단도직입적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 요 10:25, 26
여기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내가 이미 너희에게 말했는데 너희가 내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명해 주는데 너희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내가 말을 해도 믿지 않았고, 행동을 해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 바로 앞에서 거듭거듭 당신의 정체에 대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7절에서는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고, 11절에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같은 유대인이면서,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을 보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진단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 요 10:26
이 말씀은 몇 가지 의미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양은 다른 목자의 양이거나, 아니면 염소이거나, 예수님의 양떼를 늑탈하기 위해 양의 옷을 입은 이리입니다(마 7:15). 목자와 양의 관계성립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어떤 경우라도 그들에게는 불행한 진단입니다. 만약 그들이 '다른 목자의 양'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실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스스로 예수의 양떼가 아님을 자인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양이 아니고 '염소'라고 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주님은 마 25:32, 33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들을 향해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고 한다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집니다. 주님은 마 7:15에서 거짓선지자들을 향해 "양의 옷을 입은 노략질하는 이리라"시며, 그들에게 미혹된 것만으로도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양'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부심만 충만했지 정작 그들의 삶은 양의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염소'이거나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양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은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 요 10:27
오늘 말씀이 있기 전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가슴 아픈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시며 그들의 혈통을 인정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37) 얼마나 가슴 아픈 진단입니까? 지금 우리의 상태는 과연 어떠할까요? 우리 안에 주님 말씀이 있을 곳이 있을까요? 나는 주님의 양으로서 그 분 말씀을 경청해 마음에 쌓고, 주님은 그런 나를 당신의 양으로 알고 계시는 것일까요?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을 곳이 없을 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양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게 하고,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양으로 아시도록 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내 안에 있게 하는' 수행방법으로 우리교회에서 실천하고 있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라틴어 표현이라서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습니다. 우리 언어로는 대개 '거룩한 독서(Holy Reading)' 혹은 '영적 독서(Spiritual Reading)' 혹은 '성독(聖讀)'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성독聖讀 : 귀고 2세의 수도사의 사다리'를 해설한 최대형 목사에 따르면, 개신교 전통에서 이 렉시오 디비나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예배 중 교독하는 것도 렉시오 디비나이고, 어려서 교회학교에서 성경말씀을 암기하는 교육을 받아온 것도 렉시오 디비나이고, 제자훈련에서 말씀을 암기하는 것도 렉시오 디비나라는 것입니다. 이 '렉시오 디비나'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게 하는 믿음의 원천이고,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는 안내자이기 때문입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에 있어서 단순히 '정보 습득적(혹은 기능적)' 성경 읽기를 넘어, '영성 형성적' 성경 읽기에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정보 습득적' 성경 읽기는 본문의 표면을 신속하게 훑으려 하는 직선적 방법이지만, '영성 형성적' 성경 읽기는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이라는 네 단계의 영적 사다리를 오르는 동안 본문의 깊은 차원을 천천히 음미하는 방법입니다.
엘레드 스콰이어(Aelred Squire)는 '거룩한 독서(Holy Reading)'라는 책의 '교부들에게 질문함'이라는 장에서 성 티에리의 윌리엄(St. William of Thierry)의 말을 이렇게 소개해 줍니다.
우리는 성경이 기록되었을 때와 동일한 정신으로 성경을 읽어야 하며 동일한 정신으로 이해해야 한다. 주의를 집중하여 바울의 글을 읽고, 깊이 숙고함으로써 그의 정신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결코 바울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의 경험에 의해서 시편이 말하는 것을 깨닫지 않고서는 다윗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의 다른 책들도 동일하다. 단순히 읽는 것과 주의를 집중하는 것의 차이는 우정과 환대, 또는 우정과 의례적인 인사의 차이와 같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정보를 습득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본문의 깊은 차원을 천천히 음미하며 순종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숙고함으로써 그 말씀을 하신 주님 혹은 선지자, 사도들의 뜻을 공감하고 삶으로써 그 뜻을 살아내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써 그러한 영적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은 이렇게 약속해 주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요 10:28, 29
사도행전에 그런 여인이 등장합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 행 9:36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우리에게 이 여인의 이름을 알려준 것에는 뜻이 있습니다. 여인의 이름이 그의 성품을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인 그녀의 히브리어 이름은 '다비다'인데, 헬라인들이 자기들 언어로 '도르카스라고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었습니다. 도르카스는 '사슴', '담황갈색 영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슴이나 영양은 특성이 비슷합니다. 되새김질하는 반추 동물인 이 동물들은 높은 곳에 살며, 멀리서 접근해 오는 것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은 이 동물들이 시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도르카데스(dorcades)'라고 부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란 그런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되새김질하며 주의와 지혜를 위의 것들에 두고 살아가는 동시에 늘 신중함과 분별로 스스로를 경계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동물들은 율법이 정한 깨끗한 동물이고(레 11:3;신 14:6), 그 본성이 온순해 주변을 편하게 할 뿐 아니라, 죽어서는 가죽과 고기를 제공합니다. 다비다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헬라 과부들의 도르카데스였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 여인에 대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라고 그녀의 행적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시체를 곱게 씻어 다락에 뉘어놓고 서둘러 베드로가 있는 룻다로 사람을 보냅니다(행 9:37). 베드로가 도착해서 다락에 올라가 보니 주변에서 과부들이 울고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에게 옷가지를 보여주는데(행 9:39), 그 속옷과 겉옷들은 도르가가 과부들이 추울 때 그들을 입히기 위해 만든 옷가지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걸었던 진정한 양의 모습을 봅니다. 그녀는 이상을 높은 곳에 두고, 말씀을 마음에서 되새김할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해서 선행과 구제에 온 힘을 쏟아 붓는 여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양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있게 할 뿐 아니라, 말씀을 따라 내 사랑이 필요한 형제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당신의 양을 보시면서 "나는 그들을 알며"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르가가 그런 여인이었기에 주님은 그녀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 행 9:40-42
주님의 양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 계 7:15-17
이 말씀은 '흰 옷 입은 자들'(13절) 즉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14절)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양들'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라는 말씀은 광야에서 섬세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신 하나님의 돌봄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태양이나 어떤 뜨거운 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며,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시며,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영광스러운 미래를 소망하십니까? 이 영광스러운 내 인생의 결론을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양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숙고함으로서 말씀의 깊고 크신 의미를 깨달을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순명하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우리 모두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부모님과 나의 관계 안에서도 성찰해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듯이 우리가 부모님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분들 말씀을 내 마음에 두고 항상 되새기고 공경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우리를 당신 보좌 앞에 있게 하시고, 우리 위에 장막을 치셔서, 광야 같은 세상을 안전하게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약속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이 땅에서 진정한 주님의 양으로 또한 부모님의 사랑스런 자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다른 양'이 되어있지 않은가?
②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마음에 두고 순종하는 예수님의 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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