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2주 말씀과 숨결을 주신 예수님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4-23 21:26
조회
1057
부활절 제2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사도행전 | 행 5:27-32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 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응송 | 시 150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 할지어다 (2절)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6절)
서신 | 계 1:4-8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 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 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 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 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 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복음 | 요 20:19-31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 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 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 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 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 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 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 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20:21, 22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 하신 후, 어떤 행동과 말씀을 하셨습니까?
② 행 5:30-32을 묵상하십시오.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시려 는 하나님의 계획을 전한 베드로는 자신들을 누구라고 소개합니까?
③ 계 1:5을 묵상하십시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라는 고백은 당시 로마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어느덧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오고 마침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며 우리가 체험한 것은 주님의 부재와 임재, 공허함과 충만함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과정을 숨 가쁘게 지나오면서, 공포 속에서 현실을 부정해버린 제자들도 보았고, 주님의 부재로 인해 근심하던 여자들도 보았지만, 그 중에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한 것은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 24:5)는 천사의 물음이었습니다. 지금 어떻습니까? 안식 후 첫 날 천사의 말을 들은 후, 갈릴리에 계실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눅 24:8) 무덤에서 돌아가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던 여자들처럼, 부활의 감격스러움과 벅찬 여운이 아직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경말씀과 삶을 각각의 분리된 영역에서 체감하며, 그래도 '죽음은 죽음일 뿐'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미국의 기독교 작가인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책에서, 자신 역시 부활에 회의적이었던 순간이 있었음을 토로하면서, 그러나 그 의심은 자신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중에도, 어떤 때는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라며 말씀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라고 물으실 때, 베드로 같은 제자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7)라며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필립 얀시는 자신이 지금까지 신앙을 놓지 않고 굳게 잡고 있는 이유가 베드로의 이런 고백 때문이라면서, 터무니없어 보이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거룩한 바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서를 통해 확인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에 이끌리면서도 한편으로는 회의적인 마음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제자들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체포당하시던 목요일 저녁에 황망하게 흩어져 숨어버렸던 제자들이 안식 후 첫날 저녁 때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는 자신의 설교집에서 이 '저녁 때'는 시간상으로 저녁이라기보다는 '슬픔으로 어두워진 저녁'이라고 말합니다. 슬픔과 비탄의 검은 구름으로 어두워진 마음의 저녁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석양의 희미한 빛을 던져주기는 했지만,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기 이전이라 그 저녁은 슬픔과 두려움이 혼재해 있는 어둡고 무거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곧 닥쳐올지도 모를 유대인들의 잔혹한 탄압이 두려워 제자들은 집의 문들 뿐 아니라 마음까지 온통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밤의 어둠이 깊어 갈수록 그들은 더욱 깊은 마음의 어두움에 젖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분명 문들마다 다 잠겨 있었는데 주님은 어떻게 들어오신 걸까요?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주님은 태어나실 때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동정녀의 태(胎)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 사건 또한 신비 중 신비인데, 잠긴 문으로 들어오신 것이 뭐 새삼 놀랄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이 현상은 이성보다는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실 그러한 현상보다 우리가 더 깊이 보고 마음 두어야 할 것은 이 일의 의미와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슬픔과 두려움에 쌓인 채 단 하루도 보내지 않게 하셨습니다. 성 요한 크리스스톰에 따르면 주님이 '저녁 때' 그들에게 오신 것은 그 시간이 제자들의 두려움이 가장 커질 때였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며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십니다. 평강은 헬라어로 '에이레네(εἰρἠνη)'인데 '평화' 혹은 '화평'이라는 의미이고,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어로는 '샬롬(םולשׁ)'입니다. 평화는 다른 것에서 얻어지지 않습니다.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빌 4:7에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단언하곤 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란 '사람의 모든 두려움을 이해하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두려운 마음을 아셨기에 19절, 21절, 26절에서 세 번이나 거듭해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십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때의 제자들의 반응을 요한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제자들이 기뻐한 이유는 많겠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의 몸과 같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은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서 흔들리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랬기에 당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두려움에 빠져 있는 제자 중에는 장차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다"(행 5:30)고 담대하게 부활을 증언할 베드로도 섞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두려워했던 제자 베드로에서, 당당한 사도 베드로로의 변화, 그의 이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신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처음 불어넣어 주신 숨(창 2:7)은 첫 사람인 아담에게였습니다. 그로 인해 아담은 흙의 한계를 넘어 영적 존재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고 생명 없던 아담이 하나님의 영을 받으니 참 생명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좀 더 깊이 보면 예수님은 성령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성령을 함께 주셨습니다. 먼저 '말씀'을 하시고, 이어 '숨을' 내쉬셨습니다. 생기를 잃고 육체만 남은 채 슬픔과 두려움에 빠져있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태초처럼' 말씀과 숨결을 함께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 제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갔는지, 우리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는데, 내부적인 문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으로 알려진 부정직의 문제(행 5:1-11)와 행정적인 문제(행 6:1-7)였다면, 외부적인 문제는 산헤드린 공회를 비롯한 유대 관원들의 박해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은 그들이 징벌적 죽음을 당함으로서 일단락됩니다. 이후로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람들 사이에서 여러 표적과 기사를 행하기도 하고,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냅니다(행 5:11-16). 그런데 사도행전 5:17, 18에 따르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주의 사자가 한밤중에 나타나 사도들을 구출해냅니다(행 5:19). 그런데 감옥에서 나온 사도들이 도망을 가지 않고 다시 성전으로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행 5:21). 결국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은 공회를 소집하고 사도들을 끌어다 종교재판을 열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사도행전 말씀의 배경입니다. 대제사장이 사도들을 심문합니다.
우리는 대제사장의 위의 판결문을 읽으면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곤혹스러운 입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이름'이란 예수님의 이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피'는 예수께서 흘리신 피입니다. 그들에게 '이 이름'이 덮고 싶은 이름이라면, '이 사람의 피'는 덮고 싶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사도들이 덮고 싶은 이름과 덮어야 하는 사건을 떠들고 다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체포해서 심문 하는데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했다"라는 말과 "너희가 예수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한다"는 표현에서 그들의 초조한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불안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말이었습니다.
이 대답은 베드로나 사도 뿐 아니라 초대 기독교 전체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의 이 고백에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신앙이 담겨 있었고, 그들의 이 신앙고백을 토대로 초대 기독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사건' 이 사건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입니다. 사람은 죽이고, 하나님은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의 역사를 봅니다. 가인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역사는 살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로 인간의 역사는 줄곧 죽임의 역사였습니다. 21세기 문명의 시대에도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는 진실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전쟁의 가장 아까운 희생은 누가 뭐래도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사도들의 주장을 보다 섬세하게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지금 사도들이 말하는 것의 방점(傍點)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에 찍혀 있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저질러 온 죽임의 역사를 지금 그들이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살림의 역사'에 그들이 말하려는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즉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가 아니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에 메시지의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이, 그리고 거기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사실을 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해 인류 역사는 '죽임의 역사'에서 '살림의 역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죽이신 이유, 그리고 다시 살리신 이유를 사도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를 버리지 않고는 하나를 얻을 수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군중들 살리자고 당신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다시 살리셨을 뿐 아니라 오른 손으로 높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거짓 생명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 분별력을 갖출 때, 회개가 가능해집니다. 군중 속에 섞여 나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는 '거짓 생명'을 따르던 삶에서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회개와 죄 사함'을 함께 언급합니다. 회개하고 돌아서는 사람만이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 하나의 표현에서 변화된 베드로와 제자들을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끌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말씀을 거부했던 제자들, 주님이 체포당하시던 목요일 저녁에 뿔뿔이 흩어져 숨어버렸던 제자들,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인 곳의 문들을 굳게 닫아걸고 떨고 있던 제자들, 그들은 어떻게 그 슬픔과 두려움의 밤을 극복하고 이렇게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며 우리가 그 증인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생기를 잃고 육체만 남은 채, 슬픔과 두려움에 빠져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해 주시고, 태초의 그 날처럼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말씀이 내 귀에 들려오고, 주님의 숨결이 우리에게 불어오면 우리도 죽음의 자리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이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을 위해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을 기뻐했다"(행 5:41)고 하고,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를 그치지 않았다"(행 5:42)고도 합니다. 세상의 고난은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과 두려움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총은 우리를 당당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돕습니다. 그러한 삶의 변화를 보여준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지금 밧모섬에 갇혀 있습니다.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요한계시록에서 터키 서부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 쓴 편지를 보십시오.
여기에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 가지 수식어로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신 분이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건 사도 요한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 고백이 왜 중요한지를 알려면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집필되던 시기는 기독교가 로마 황제에게 극심한 박해를 받던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심한 경우에는 사자에게 던져져서 잔인한 죽음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더구나 유배자의 신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땅의 임금들의 머리'라고 말하는 건 순교를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임에도 어떻게 요한은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에게 임재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매우 당당하게 황제숭배를 거부할 수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땅의 임금이시라고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두지 않으면, 예수의 호흡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처음 제자들처럼 슬픔과 두려움에 빠져 어둡고 침울한 어둠을 감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경청하고 마음에 간직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숨결인 성령으로 숨 쉬며 살아가노라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존재에 가득 차고, 주님의 숨결이 우리 존재에 가득 차서 어둡고 침울한 세상에 생명을 심고,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틔워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재에도 마치 잠긴 문으로 들어가시듯 우리 마음에 들어와 주십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과 나 사이에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가 초월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너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이성이 당신의 말씀과 일치되게 하시고, 당신 숨결을 내 안에 불어넣어 주심으로 숨처럼 영(靈)으로 나와 함께해 주십니다. 숨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내 생명이 지속되도록 해줍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불어넣어주신 영은 내 안에 스며들어 나의 생명이 예수님의 생명과 결합되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아담의 유전인자를 불려 받은 생명이 아닌,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오늘도 전쟁과 죽음의 소식이 어지러이 들려오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생명을 노래하고, 싹틔우며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제자들처럼 두려움 속에서 문을 닫아걸고 살고 있지 않은가?
② 말씀과 성령의 숨결 안에서 생명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사도행전 | 행 5:27-32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 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응송 | 시 150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 할지어다 (2절)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6절)
서신 | 계 1:4-8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 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 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 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 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 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복음 | 요 20:19-31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 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 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 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 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 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 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 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20:21, 22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 하신 후, 어떤 행동과 말씀을 하셨습니까?
② 행 5:30-32을 묵상하십시오.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시려 는 하나님의 계획을 전한 베드로는 자신들을 누구라고 소개합니까?
③ 계 1:5을 묵상하십시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라는 고백은 당시 로마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말씀과 숨결을 주신 예수님
어느덧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오고 마침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며 우리가 체험한 것은 주님의 부재와 임재, 공허함과 충만함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과정을 숨 가쁘게 지나오면서, 공포 속에서 현실을 부정해버린 제자들도 보았고, 주님의 부재로 인해 근심하던 여자들도 보았지만, 그 중에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한 것은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 24:5)는 천사의 물음이었습니다. 지금 어떻습니까? 안식 후 첫 날 천사의 말을 들은 후, 갈릴리에 계실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눅 24:8) 무덤에서 돌아가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던 여자들처럼, 부활의 감격스러움과 벅찬 여운이 아직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경말씀과 삶을 각각의 분리된 영역에서 체감하며, 그래도 '죽음은 죽음일 뿐'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미국의 기독교 작가인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책에서, 자신 역시 부활에 회의적이었던 순간이 있었음을 토로하면서, 그러나 그 의심은 자신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중에도, 어떤 때는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라며 말씀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라고 물으실 때, 베드로 같은 제자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7)라며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필립 얀시는 자신이 지금까지 신앙을 놓지 않고 굳게 잡고 있는 이유가 베드로의 이런 고백 때문이라면서, 터무니없어 보이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거룩한 바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서를 통해 확인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에 이끌리면서도 한편으로는 회의적인 마음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제자들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 요 20:19a
주님께서 체포당하시던 목요일 저녁에 황망하게 흩어져 숨어버렸던 제자들이 안식 후 첫날 저녁 때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는 자신의 설교집에서 이 '저녁 때'는 시간상으로 저녁이라기보다는 '슬픔으로 어두워진 저녁'이라고 말합니다. 슬픔과 비탄의 검은 구름으로 어두워진 마음의 저녁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석양의 희미한 빛을 던져주기는 했지만,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기 이전이라 그 저녁은 슬픔과 두려움이 혼재해 있는 어둡고 무거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곧 닥쳐올지도 모를 유대인들의 잔혹한 탄압이 두려워 제자들은 집의 문들 뿐 아니라 마음까지 온통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밤의 어둠이 깊어 갈수록 그들은 더욱 깊은 마음의 어두움에 젖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요 20:19b
분명 문들마다 다 잠겨 있었는데 주님은 어떻게 들어오신 걸까요?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주님은 태어나실 때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동정녀의 태(胎)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 사건 또한 신비 중 신비인데, 잠긴 문으로 들어오신 것이 뭐 새삼 놀랄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이 현상은 이성보다는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실 그러한 현상보다 우리가 더 깊이 보고 마음 두어야 할 것은 이 일의 의미와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슬픔과 두려움에 쌓인 채 단 하루도 보내지 않게 하셨습니다. 성 요한 크리스스톰에 따르면 주님이 '저녁 때' 그들에게 오신 것은 그 시간이 제자들의 두려움이 가장 커질 때였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며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십니다. 평강은 헬라어로 '에이레네(εἰρἠνη)'인데 '평화' 혹은 '화평'이라는 의미이고,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어로는 '샬롬(םולשׁ)'입니다. 평화는 다른 것에서 얻어지지 않습니다.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빌 4:7에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단언하곤 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란 '사람의 모든 두려움을 이해하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두려운 마음을 아셨기에 19절, 21절, 26절에서 세 번이나 거듭해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십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때의 제자들의 반응을 요한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 요 20:20
제자들이 기뻐한 이유는 많겠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의 몸과 같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은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서 흔들리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랬기에 당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두려움에 빠져 있는 제자 중에는 장차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다"(행 5:30)고 담대하게 부활을 증언할 베드로도 섞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두려워했던 제자 베드로에서, 당당한 사도 베드로로의 변화, 그의 이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 요 20:22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신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처음 불어넣어 주신 숨(창 2:7)은 첫 사람인 아담에게였습니다. 그로 인해 아담은 흙의 한계를 넘어 영적 존재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고 생명 없던 아담이 하나님의 영을 받으니 참 생명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좀 더 깊이 보면 예수님은 성령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성령을 함께 주셨습니다. 먼저 '말씀'을 하시고, 이어 '숨을' 내쉬셨습니다. 생기를 잃고 육체만 남은 채 슬픔과 두려움에 빠져있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태초처럼' 말씀과 숨결을 함께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 제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갔는지, 우리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 행 5:27a
당시 초대교회는 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는데, 내부적인 문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으로 알려진 부정직의 문제(행 5:1-11)와 행정적인 문제(행 6:1-7)였다면, 외부적인 문제는 산헤드린 공회를 비롯한 유대 관원들의 박해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은 그들이 징벌적 죽음을 당함으로서 일단락됩니다. 이후로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람들 사이에서 여러 표적과 기사를 행하기도 하고,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냅니다(행 5:11-16). 그런데 사도행전 5:17, 18에 따르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주의 사자가 한밤중에 나타나 사도들을 구출해냅니다(행 5:19). 그런데 감옥에서 나온 사도들이 도망을 가지 않고 다시 성전으로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행 5:21). 결국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은 공회를 소집하고 사도들을 끌어다 종교재판을 열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사도행전 말씀의 배경입니다. 대제사장이 사도들을 심문합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 행 5:28
우리는 대제사장의 위의 판결문을 읽으면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곤혹스러운 입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이름'이란 예수님의 이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피'는 예수께서 흘리신 피입니다. 그들에게 '이 이름'이 덮고 싶은 이름이라면, '이 사람의 피'는 덮고 싶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사도들이 덮고 싶은 이름과 덮어야 하는 사건을 떠들고 다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체포해서 심문 하는데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했다"라는 말과 "너희가 예수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한다"는 표현에서 그들의 초조한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불안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말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 행 5:30
이 대답은 베드로나 사도 뿐 아니라 초대 기독교 전체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의 이 고백에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신앙이 담겨 있었고, 그들의 이 신앙고백을 토대로 초대 기독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사건' 이 사건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입니다. 사람은 죽이고, 하나님은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의 역사를 봅니다. 가인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역사는 살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로 인간의 역사는 줄곧 죽임의 역사였습니다. 21세기 문명의 시대에도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는 진실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전쟁의 가장 아까운 희생은 누가 뭐래도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사도들의 주장을 보다 섬세하게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지금 사도들이 말하는 것의 방점(傍點)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에 찍혀 있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저질러 온 죽임의 역사를 지금 그들이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살림의 역사'에 그들이 말하려는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즉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가 아니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에 메시지의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이, 그리고 거기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사실을 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해 인류 역사는 '죽임의 역사'에서 '살림의 역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죽이신 이유, 그리고 다시 살리신 이유를 사도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 행 5:31
하나를 버리지 않고는 하나를 얻을 수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군중들 살리자고 당신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다시 살리셨을 뿐 아니라 오른 손으로 높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거짓 생명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 분별력을 갖출 때, 회개가 가능해집니다. 군중 속에 섞여 나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는 '거짓 생명'을 따르던 삶에서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회개와 죄 사함'을 함께 언급합니다. 회개하고 돌아서는 사람만이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 행 5:32
우리는 이 하나의 표현에서 변화된 베드로와 제자들을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끌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말씀을 거부했던 제자들, 주님이 체포당하시던 목요일 저녁에 뿔뿔이 흩어져 숨어버렸던 제자들,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인 곳의 문들을 굳게 닫아걸고 떨고 있던 제자들, 그들은 어떻게 그 슬픔과 두려움의 밤을 극복하고 이렇게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며 우리가 그 증인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생기를 잃고 육체만 남은 채, 슬픔과 두려움에 빠져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해 주시고, 태초의 그 날처럼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말씀이 내 귀에 들려오고, 주님의 숨결이 우리에게 불어오면 우리도 죽음의 자리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이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을 위해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을 기뻐했다"(행 5:41)고 하고,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를 그치지 않았다"(행 5:42)고도 합니다. 세상의 고난은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과 두려움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총은 우리를 당당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돕습니다. 그러한 삶의 변화를 보여준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지금 밧모섬에 갇혀 있습니다.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요한계시록에서 터키 서부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 쓴 편지를 보십시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 계 1:4, 5
여기에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 가지 수식어로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신 분이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건 사도 요한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 고백이 왜 중요한지를 알려면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집필되던 시기는 기독교가 로마 황제에게 극심한 박해를 받던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심한 경우에는 사자에게 던져져서 잔인한 죽음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더구나 유배자의 신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땅의 임금들의 머리'라고 말하는 건 순교를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임에도 어떻게 요한은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에게 임재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매우 당당하게 황제숭배를 거부할 수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땅의 임금이시라고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두지 않으면, 예수의 호흡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처음 제자들처럼 슬픔과 두려움에 빠져 어둡고 침울한 어둠을 감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경청하고 마음에 간직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숨결인 성령으로 숨 쉬며 살아가노라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존재에 가득 차고, 주님의 숨결이 우리 존재에 가득 차서 어둡고 침울한 세상에 생명을 심고,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틔워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재에도 마치 잠긴 문으로 들어가시듯 우리 마음에 들어와 주십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과 나 사이에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가 초월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너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이성이 당신의 말씀과 일치되게 하시고, 당신 숨결을 내 안에 불어넣어 주심으로 숨처럼 영(靈)으로 나와 함께해 주십니다. 숨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내 생명이 지속되도록 해줍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불어넣어주신 영은 내 안에 스며들어 나의 생명이 예수님의 생명과 결합되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아담의 유전인자를 불려 받은 생명이 아닌,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오늘도 전쟁과 죽음의 소식이 어지러이 들려오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생명을 노래하고, 싹틔우며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제자들처럼 두려움 속에서 문을 닫아걸고 살고 있지 않은가?
② 말씀과 성령의 숨결 안에서 생명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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