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말씀을 기억하면 부활이 보인다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사도행전 | 행 10:34-43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 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 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응송 | 시 118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서신 | 고전 15:19-26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 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 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 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복음 | 눅 24:1-12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 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 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 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 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24:6-8을 묵상하십시오. 천사의 안내를 받아 여자들이 기억해낸 것은 무엇이며, 이후로 여인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② 행 10:41, 43을 묵상하십시오. 베드로는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를 어 떻게 제시했으며, 부활의 결과를 어떻게 소개했습니까?
③ 고전 15:20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궁극적으 로 어떤 사람들을 위한 부활이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말씀을 기억하면 부활이 보인다.
인간의 삶에는 심오하고도 놀라운 두 가지 상반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탄생의 신비이고, 하나는 죽음의 사건입니다. 탄생이 기쁜 것은 생명이 태어났기 때문이고, 죽음이 슬픈 것은 그 생명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죽음은 탄생 이상으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이 '잔인한 망나니'라고, 또 '인류에게 예외 없는 폭군'이라고 명명한 이 죽음은 우리 수명의 길고 짧음과 관계없이 끈질기게 생명의 대척점에 있으면서, 왜 인간이 질풍노도처럼 교만하다가 먼지처럼 땅에 떨어지는지, 왜 장작불처럼 정열적으로 타오르다가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지, 왜 아름다운 꽃처럼 뽐내다가 마른 풀처럼 시들고 사라지는지를 끊임없이 묻게 하고, 사후에 인간은 어디로 가는 것인지, 관 뚜껑이 닫히는 순간에는 어떤 과정이 사람 앞에 펼쳐지는지를 묻게 했습니다. 이 모든 물음의 배후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은 어느덧 하나님의 존재를 소환해 냅니다. 이렇듯 인류는 죽어서 썩어지고, 하나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작품인 이성적 인간은 파괴되고 사라지는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하실 수가 있는 것인지, 죽음과 부패가 당신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지배하도록 방치해 두실 것인지, 그렇다면 인간을 무에서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차라리 창조하지 않았던 것만 못한 것이 아니었는지, 성 삼위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유(有)로 데려오신 그 작품들을 다시 무(無)의 상태로 내모는 현실이 하나님의 선(善)과 맞지 않는 부조화가 아닌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가 몰고 온 이 '처음 창조 의도와의 부조화' 즉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인간에게 당신 말씀이 들려오게 하셔서 인간이 죄에서 떠날 수 있는 길을 가리켜 주시고, 그 길을 걸음으로서 죽음을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엔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셔서 당신이 사랑하신 세상에 보내어 사람들이 당신 형상을 눈으로 보게 하시고(요 3:16), 귀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실 뿐 아니라, 마침내는 희생의 피를 흘리게 하셔서 사람들의 원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성 아타나시오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육체가 없고 부패를 모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께서 죽음의 종이 되어 있는 인간을 보시고 연민을 느끼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당신의 관용을 베푸셔서 우리의 나약함을 손수 짊어지셨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더욱 성스런 방법으로 세상에 오실 수 있었지만, 인간 위에 군림하는 죽음에 의해 하나님 아버지의 작품이 불완전한 미완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시고, 우리 인간과 동일한 육체를 동정녀 테오토코스를 통해 취하셔서 태어나셨으며, 죽음을 통해 당신의 몸을 '만민'을 위한 제물로 제공하셨다. (니콜라스 바실리아디스/박용범 역 「죽음의 신비」 정교회출판사. 100-101쪽)
그렇게 죽음을 제거하신 '육화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물 무덤'이었던 요단강 물속에 들어가 친히 세례 받으심으로 죄에 빠진 모든 인간에게 세례의 길을 보여주시고, 죽음의 독침이 세례를 통해 힘을 잃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의 전조였고, 동시에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전조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기 이전에 이미 여러 사역을 통해 부활의 전조를 보이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 하심으로 나인이라는 동네에 살던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셨고, "아이야 일어나라"(눅 8:54) 하심으로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된 외딸을 살리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라고 부르심으로 그를 죽음으로부터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며 주님께서 비통함에 쌓여 눈물을 흘리셨을 때(요 11:33-35), 그 눈물은 모든 죽음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었고, 죽음이 인간에게 얼마나 참혹하고 잔인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아시는 눈물이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었고, 죽음을 끝내시려는 생명의 눈물이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이 없는 생명을 인류에게 주시기 위해 죽으셔야 했습니다. 부활이고 생명이신(요 14:6) 당신 죽음만이 참 생명을 드러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단히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를 죽인 사람들과 죽음에 대해 치명적 부상을 입히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목자를 쳐서 그 양떼인 제자들을 흩어지게 했기에(슥 13:7, 막 14:27), 이제 예수의 영광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죽인 예수가 부활할까 두려워, 무덤으로 가서 무덤을 막은 돌을 인봉하고, 경비병을 세워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마 27:66). 하지만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로 인해 인간의 부질없는 야욕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게 하셨으며, 오늘 서신서의 바울의 표현을 빌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잠든 이들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심으로서 '죽음의 종말'이라는 구원의 절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일제히 그리스도의 부활이 몰고 온 통쾌한 반전 스토리를 전해줍니다.
복음서에서 천사들은 예수의 시체가 사라져 근심하고 있는 여자들(눅 24:4)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 24:5-6a)라고 말하면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눅 24:6b)고 당부합니다. 여자들이 기억해야 할 '말씀'은 명료했습니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눅 24:7)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는 자기들도 '그가 행하신 일의 증인'(행 10:39)이라며, 사람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고(행 10:40), 심지어 자기들은 부활하신 그와 음식을 먹었으며(행 10:41), 그를 믿는 사람들은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증언했습니다(행 10:43).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고전 15:20),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각각 자기 차례대로"(고전 15:23) 부활에 이르게 될 것임을 증언합니다(고전 15:23, 24). 복음서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 눅 24:1-3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이 거룩한 여인들은 안식 후 첫날 새벽 일찍이, 준비해 놓았던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누가의 이 기록을 '그들이 안식일 밤에 출발해서 주일 새벽에 그곳에 도착했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인들은 금요일에 주님의 장례가 치러진 다음 무덤을 떠나 노동이 허용된 시간동안 향품을 준비해 두고, 안식일 동안에는 율법을 따라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다시 노동이 허용되는 안식일이 끝난 저녁에 출발해서 안식 후 첫 날 새벽 일찍 무덤에 도착한 것입니다. 이 무덤은 마태와 마가의 증언에 의하면, '돌로 막고 인봉까지 한 후 병사들에게 지키게 한 곳'(마 27:66, 막 15:46)입니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여자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막 16:3) 하며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런 언급은 없이, 여자들이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눅 24:2) 라고, 당시 여자들이 목격했던 상황만 간결하게 전해줍니다. 이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사건'에 대해 존자 베다는 복음서 강해에서 흥미로운 해석을 부여했습니다. '신비로 풀면'이라는 전제 하에 한 해석이기 때문에 그의 이 해석은 주관적인 것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율법이 돌판에 새겨진 점을 감안해 볼 때(출 24:12;32:15;34:1), 무덤의 돌이 옮겨진 것은 지금껏 율법에 의해 가리어지고 닫혀 있던 거룩한 복음들이 드러난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닫혀 있던 무덤의 돌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아직 여자들은 무덤 자체에 시선이 가려 '주님의 부활'이라는 복음의 사건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여자들은 '무덤까지 따라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어떻게 모시는지 눈여겨보았던 그것'(눅 23:55) 때문에 오히려 더 신앙의 시선에 장애를 겪었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때로는 그렇듯 이성이 우리 눈을 가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도 근심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 눅 24:4
누가는 아직 이성 안에서 '근심하는 여자들'과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을 오버랩 시킵니다. '찬란한 옷을 입었다'는 말은 천사들과 하늘에 사는 존재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상징적인 어법입니다. 그러니까 '근심하는 여자들'과 대비되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등장은 땅의 근심을 끊어내는 하늘의 사건이 지금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얼굴을 땅에 묻고 있을 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 눅 24:5
이것은 누가의 독특한 문구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맞으며 이마에 재를 바르고 창 3:19절의 말씀에 따라 고백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지난 사순절의 여정을 다 보내고, 오늘 부활절 아침을 맞아 우리가 듣는 말씀은 놀라운 반전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허무하게 끝마쳐지는 인생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우리에게 새로우며 본질적인 생명의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천사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 눅 24:6a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파악할 수는 없지만, 지금 여자들의 귓가를 울리는 분명한 말씀은 '살아있다', '살아나셨다'는 말씀입니다. 죽음의 자리인 무덤 안에서 여자들에게 살아있음의 메시지가 들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 눅 24:6b-7
천사들의 증언을 주목해서 다시 보십시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 24:5).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 24:6a). 그러고 나서 천사들은 여자들을 향해 '기억하라'고 당부합니다. '무얼' 기억하라는 것입니까? '말씀'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 눅 24:8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상황들 속에서 말씀을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슬픔 가운데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의 가슴에 다시 뜨거움을 회복시켜 준 것도 말씀이었습니다. 여자들은 비로소 '말씀'을 기억해 냅니다. 마 28:13에 따르면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 추종자들에 의해 날조된 사건이라고 소문을 퍼뜨립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런 음해에 대한 치밀한 반론을 '말씀에 대한 기억'에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씀 위에 서야만 하는 명백한 이유입니다. 마침내 여자들은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립니다(눅 24:9). 그런데 여자들의 말을 전해들은 사도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 눅 24:11, 12
사도들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하도 뜻밖이어서 '부질없는 소리로 여겨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만 베드로만이 무덤으로 달려가 현장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나 현장을 들여다 본 베드로 역시 놀라게만 여겼을 뿐, 나머지 제자들과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십니까? 증언하신다면 어떤 논리로 이 부활사건을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증언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사람들에게 그 어떤 '논리로서' 납득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목격한 대로, 그리고 말씀에 의존해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 행 10:39-41
살아있는 존재만이 먹는 행위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그들과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육신의 부활을 증명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와 야이로의 딸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후에는 그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라고 하셨고(막 5:43), 나사로는 당신과 함께 식탁에 앉게 하심으로써(요 12:2) 그가 실제로 살아났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랬기에 베드로 역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던 바로 그 경험을 예수님 부활의 증거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베드로는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냅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 행 10:43
죄 사함의 가장 큰 은총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행복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죽은 자들 또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각각 자기 차례대로 부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 고전 21-23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 우리에게 적대적인 율법을 끝내시고, 당신께서 이루신 부활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에게서 죽음의 그늘을 지워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사신 일이 없으셨다면 당신 육신의 죽음과 육신의 부활을 통해 죽음의 그늘을 지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신성(神性)을 감추신 그리스도의 겸손은, 아담이 내려간 지옥에까지 이르러야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지옥의 정복자로서, 지옥에 갇힌 자들의 구원자로서, 생명의 주님으로서 죽은 이들을 건져 올려 부활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 아토스의 바토페디 수도원에는 1312년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습니다. 이 성화는 부활의 영적 사실 즉 주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신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내려가심의 목적과 결과를 보여줍니다. 성화에는 지옥의 깊이와, 어두운 심연이 그려졌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부숴 버린 지옥문 두 짝을 밟고 계십니다. 어두운 심연 속에는 사탄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왼손에는 수난의 못 자국이 선명하고, 오른 손으로는 아담을 무덤에서 끌어올리십니다. 이 행동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옛 아담과 죄와 죽음에 매인 모든 인류를 해방시키시고, 부활이라는 새로운 생명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들은 지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하여 부활절 아침기도 때 이렇게 찬미합니다.
오, 그리스도여, 당신은 지구의 심연으로 내려가시어 사로잡힌 자들을 가둔 영원한 문들을 부수시고 고래 뱃속에서 사흘을 지낸 요나와 같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지옥을 이겨주시고, 죽음을 이겨 부활을 선물해 주신 감격이 여러분의 영혼에 항상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시선을 무덤에 두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②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에 이를 존재로서의 기쁨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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