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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6주 학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4-09 11:30
조회
891
사순절 제6주 | 종려주일 | 고난주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50:4-9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 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 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 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 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 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 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응송 | 시 3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서신 | 빌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 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복음 | 눅 23:32-38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 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 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50:4-5, 8절을 묵상하십시오. 고난 받는 종이 모욕을 겪으면서 도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② 눅 23:34을 묵상하십시오. 인간의 야만적인 폭력과 모욕을 겪으시는 중에도 예수님의 시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③ 빌 2:6-11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사순절이 시작된 지 어느덧 40여일이 흘렀습니다. 이 여정을 걸어오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요? 자신을 살펴보았습니까? 회심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자가 되었습니까? 사순절 달력을 따라 말씀묵상에 힘쓰고, 사순절 동안 절제한 산물로 이웃을 돕고, 편리 지향적이고 소비 지향적인 삶에서 떠나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며 생태 지향적 삶에로 회심을 이루셨습니까? 그런 모든 변화들이 사순절을 지나며 이루어야 할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의 과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걸어온 사순절 여정이 치열한 변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었다면, 그 여정의 마지막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는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은, 수난 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자세히 관상하며 따르는 시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가파른 지점을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聖주간 혹은 고난주간이라 부릅니다. 이 주간은 성주간의 시작이며 사순절의 끝입니다. 성 목요일 저녁예배가 시작되면서 사순절은 끝이 나고, 동시에 '주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성삼일(Paschal Triduum)'이라는 교회력 최고의 절기가 시작되는데.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로 이어지는 이 '파스카 삼일'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담긴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따라서 이 성삼일 동안 교회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배와 기도회를 통해 심층적으로 묵상합니다. 목요일에는 세족식과 함께 '성목요일성찬예배'가 있고, 금요일에는 금식과 더불어 '성금요일예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 전 날인 토요일에 전례적 교회들은 '예수 부활 대축일 저녁기도(성무일도)'를 드리면서 파스카 성삼일 축제를 마무리하고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해마다 종려주일이면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긴 행렬입니다. 1546년, 크레테의 테오파니스가 그린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성화가 있습니다. 박효섭 목사님께서 이 성화에 대해 분석한 글이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기쁨과 축하의 상징입니다. 유대인들은 지체 높은 사람을 환영할 때 항상 종려나무 가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군중들은 죽음의 정복자로서 나귀를 타고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손에 가지를 들고 성문에 모여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들어오십니다. 머리를 약간 뒤로 돌리고 계신 것은 뒤따라오는 제자들을 보시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예루살렘을 보고 계시 것 같기도 합니다. 오른 손으로는 군중들을 축복하거나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백성들은 행복해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로마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유다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예루살렘 입성 성화는 아이들이 화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무 꼭대기에 앉아 가지를 꺾고 있거나, 어른들처럼 주님 지나시는 길에 겉옷을 펼쳐놓고 있거나, 혹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사가는 그들의 존재에 그다지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묘사하면서 그들은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놓았다"(마 21:8)고만 말할 뿐, 거기에 어린아이들이 있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화를 통해서는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들이 겉옷을 펼치고 주님을 환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예수께서 로마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새 왕국을 세울 것이라는 기대로 예수를 환영하고 있지만, 아이들은 숨은 동기나 이익, 지상 권력에 대한 아무런 사심도 없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종려주일을 맞이하고 고난주간을 함께 걸으며 자발적으로 고난을 향해 나아가시는 주님, 그러나 부활을 향해 걸으시는 주님과 함께 고난으로부터 부활로의 여정을 걸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고난주간 동안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피조물들의 거센 저항과 공격입니다. 구약성경은 자기의 동족들에게 온 몸을 내어맡긴 채 채찍과 뺨을 맞고 수염을 뽑히며 침 뱉음을 당하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복음서의 말씀은 무죄하신 그리스도를 거슬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꾸미는 비정한 음모의 현장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고난주간의 의식들은 슬픔을 내면에 끌어안은 채로 치러지지만,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은총으로 인해서는 감사와 기쁨을 만감(萬感)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말씀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이사야서에는 비슷한 유형의 '종의 노래'가 42장, 49장, 50장, 그리고 52-53장까지 네 개가 있는데, 오늘 말씀은 그 중 세 번째 '고난 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여기에서 고난 받는 종은 '나'라는 일인칭 형식을 빌어서 자기에게 주어진 종의 사명을 세 가지로 노래합니다. 첫째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이고, 둘째는, 아침마다 깨어서 말씀을 이해하는 일이고, 셋째는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박해를 이겨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사명을 감당해 내기에는 당시 시대가 너무 완고하고 사나웠습니다.
여기에 종이 당하는 고난의 현장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등을 때리고, 수염을 뽑고, 침을 뱉습니다. 수치와 모욕감을 느끼게 해서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는 잔인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 이런 모욕을 당한 건 자기의 잘못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직무로 인해 이런 고난을 당합니다. 이사야의 직무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로하고, 아침마다 깨어 말씀을 묵상하고, 깨달은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4절에 의하면 그는 여호와께로부터 '학자들의 혀'를 받았습니다. '학자'를 히브리어로 '림무드(דומל)'라고 하는데, 스승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배우는 '제자'를 뜻합니다. 이 '학자'는 탁상공론식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시련을 겪으면서 습득된 체험적 지식을 가진 자입니다. 따라서 이 '학자의 혀'를 지닌 자는 개인적인 지식욕을 만족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한 복판에서 삶의 시련을 온 몸으로 겪어내며 습득된 말씀을 세상에 선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명을 받아 실천한 사람이 왜 그런 모욕과 수치를 당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듣기 싫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싫어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했던 것이 '말씀을 선포하는 것에서 자기 존재의 근거와 이유를 찾았던' 선지자들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자기에게 다가온 고난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을 완전히 맡겼습니다. 때리는 이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이에게 뺨을 맡기고, 침 뱉는 이 앞에서 얼굴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사야 선지자가 모욕과 수치를 이겨내고 선지자로서 자기 길을 다 갈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씀을 '듣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학자'를 뜻하는 '림무드(דומל)'는 말하는 혀 못지않게 듣는 귀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전하는 것'보다 우선인 것입니다. 그 사실은 그의 고백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 말씀은 앞에 있는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라는 말씀을 다시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는 이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귀를 열고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마다 이사야의 귀를 열어 귀를 깨우쳐 말씀을 알아듣게 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모욕과 수치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그는 아침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았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그렇습니다. 이사야의 힘은 언제나 주 여호와의 도우심에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선을 위해 싸우다가 고난을 당하는 이들의 처지를 헤아리고 계신 하나님 말씀을 아침마다 경청했기에 그는 모진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표정의 동요 없이 이겨내었고,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말씀묵상과 기도' 즉 수련입니다. 우리 감리회에서 발간한 '매일 기도서'에 따르면 '렉시오(Lectio)' 즉 '성경 읽기'의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려는 것에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성경을 읽는 목적은 단지 성경에서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종국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지음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묵상(meditation)'은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그 말씀의 주변을 거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가리켜 빅토르 위고(Hugh of Saint Victor)는 '마주한 진리의 핵심을 꿰뚫기'라고 표현했고, 묵상의 즐거움은 좋은 벗과의 대화에 흠뻑 빠져드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에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의 사유'라고 했습니다. (스티브 하퍼/정명성 옮김 「매일 기도서」 KMC)
이렇게 '독서'를 통해 받고, '묵상'을 통해 깊이 생각한 말씀들을 '관찰(tem-plari)' 즉 '관상(Contemplation)'함으로써 '기록된 말씀'은 우리 안에서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이러한 영적 노력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침마다 자신의 귀를 열어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룬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이사야는 늘 이렇게 자신과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 수난 이야기의 절정은 예수님께서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무법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두 강도가 함께 못 박혔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모욕(侮辱)하려는 목적으로 무법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들의 폭력과 모욕을 받아들이심으로서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사 53:12a) 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당신 안에서 성취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b) 이 말씀은 어떻게 성취되었을까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자신의 길로 가버렸고, 죽기까지 함께 하겠다던 제자들은 달아나버렸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를 환영하던 군중들은 폭력과 음모의 하수인으로 몰락해버린, 그리고 인간의 야만적인 폭력과 모욕이 당신을 향해 자행되던 그 처참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정확하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게 하신 말씀을 예수님은 당신 희생을 담보로 성취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운명으로 닥친 십자가의 죽음을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받아들이십니다. 구약의 말씀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묘사해 준 그대로의 태도였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신 걸까요? 주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병든 영혼을 치유하시고, 우리와 같아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인간의 상태를 태초의 모습대로 회복시키십니다. 첫 아담은 태초에 기쁨의 낙원에 있었습니다. 죄로 인해 부패하기 전 그는 고상했었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에 떨어진 그는 불행히도 죽음의 올가미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큰 슬픔을 안겨드리고 만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기도는 누구를 위한 기도일까요? 당신을 판 유다와 도망가 버린 제자들이었을까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던 사람들일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b) '많은 사람의 죄' 바로 우리 모두의 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를 위한 기도였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서신서에서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주님은 죽음에 이르도록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최선이었고, 그의 낮춤은 하나님의 높임을 거쳐 우리의 영원한 파스카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능욕을 받았습니다. 십자가는 고독의 끝자락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소외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자리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폭력과 미움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능합니다. 작은 모욕에도 상처받고, 누군가 내게 작은 손해라도 입히면 곧장 사랑의 시선을 거두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영적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과 함께 길을 가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내 가까이 계심을 알고 그 하나님께 영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려면 이사야 선지자처럼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 '알아들음'이 이사야로 하여금 모진 수치와 모욕을 개의치 않고 '고난 받는 종'의 길을 가게 했던 것처럼, 이 '알아들음'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잔인한 폭력과 모욕을 개의치 않고 '수난당하는 어린 양'의 길을 가시게 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깊이 읽고 묵상하고 관상할 때, 우리 역시 그 '알아들음'으로 인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참여하고 주님과 함께 부활의 아침을 맞을 것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말씀에의 경청이 없어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② 말씀과 기도로 이어지는 수련을 통해 세상을 이기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50:4-9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 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 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 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 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 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 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응송 | 시 3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서신 | 빌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 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복음 | 눅 23:32-38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 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 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50:4-5, 8절을 묵상하십시오. 고난 받는 종이 모욕을 겪으면서 도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② 눅 23:34을 묵상하십시오. 인간의 야만적인 폭력과 모욕을 겪으시는 중에도 예수님의 시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③ 빌 2:6-11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학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사순절이 시작된 지 어느덧 40여일이 흘렀습니다. 이 여정을 걸어오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요? 자신을 살펴보았습니까? 회심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자가 되었습니까? 사순절 달력을 따라 말씀묵상에 힘쓰고, 사순절 동안 절제한 산물로 이웃을 돕고, 편리 지향적이고 소비 지향적인 삶에서 떠나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며 생태 지향적 삶에로 회심을 이루셨습니까? 그런 모든 변화들이 사순절을 지나며 이루어야 할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의 과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걸어온 사순절 여정이 치열한 변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었다면, 그 여정의 마지막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는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은, 수난 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자세히 관상하며 따르는 시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가파른 지점을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聖주간 혹은 고난주간이라 부릅니다. 이 주간은 성주간의 시작이며 사순절의 끝입니다. 성 목요일 저녁예배가 시작되면서 사순절은 끝이 나고, 동시에 '주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성삼일(Paschal Triduum)'이라는 교회력 최고의 절기가 시작되는데.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로 이어지는 이 '파스카 삼일'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담긴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따라서 이 성삼일 동안 교회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배와 기도회를 통해 심층적으로 묵상합니다. 목요일에는 세족식과 함께 '성목요일성찬예배'가 있고, 금요일에는 금식과 더불어 '성금요일예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 전 날인 토요일에 전례적 교회들은 '예수 부활 대축일 저녁기도(성무일도)'를 드리면서 파스카 성삼일 축제를 마무리하고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해마다 종려주일이면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긴 행렬입니다. 1546년, 크레테의 테오파니스가 그린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성화가 있습니다. 박효섭 목사님께서 이 성화에 대해 분석한 글이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기쁨과 축하의 상징입니다. 유대인들은 지체 높은 사람을 환영할 때 항상 종려나무 가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군중들은 죽음의 정복자로서 나귀를 타고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손에 가지를 들고 성문에 모여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들어오십니다. 머리를 약간 뒤로 돌리고 계신 것은 뒤따라오는 제자들을 보시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예루살렘을 보고 계시 것 같기도 합니다. 오른 손으로는 군중들을 축복하거나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백성들은 행복해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로마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유다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예루살렘 입성 성화는 아이들이 화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무 꼭대기에 앉아 가지를 꺾고 있거나, 어른들처럼 주님 지나시는 길에 겉옷을 펼쳐놓고 있거나, 혹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사가는 그들의 존재에 그다지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묘사하면서 그들은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놓았다"(마 21:8)고만 말할 뿐, 거기에 어린아이들이 있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화를 통해서는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들이 겉옷을 펼치고 주님을 환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예수께서 로마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새 왕국을 세울 것이라는 기대로 예수를 환영하고 있지만, 아이들은 숨은 동기나 이익, 지상 권력에 대한 아무런 사심도 없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종려주일을 맞이하고 고난주간을 함께 걸으며 자발적으로 고난을 향해 나아가시는 주님, 그러나 부활을 향해 걸으시는 주님과 함께 고난으로부터 부활로의 여정을 걸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고난주간 동안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피조물들의 거센 저항과 공격입니다. 구약성경은 자기의 동족들에게 온 몸을 내어맡긴 채 채찍과 뺨을 맞고 수염을 뽑히며 침 뱉음을 당하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복음서의 말씀은 무죄하신 그리스도를 거슬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꾸미는 비정한 음모의 현장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고난주간의 의식들은 슬픔을 내면에 끌어안은 채로 치러지지만,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은총으로 인해서는 감사와 기쁨을 만감(萬感)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 사 50:4
이 말씀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이사야서에는 비슷한 유형의 '종의 노래'가 42장, 49장, 50장, 그리고 52-53장까지 네 개가 있는데, 오늘 말씀은 그 중 세 번째 '고난 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여기에서 고난 받는 종은 '나'라는 일인칭 형식을 빌어서 자기에게 주어진 종의 사명을 세 가지로 노래합니다. 첫째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이고, 둘째는, 아침마다 깨어서 말씀을 이해하는 일이고, 셋째는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박해를 이겨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사명을 감당해 내기에는 당시 시대가 너무 완고하고 사나웠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 사 50:6
여기에 종이 당하는 고난의 현장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등을 때리고, 수염을 뽑고, 침을 뱉습니다. 수치와 모욕감을 느끼게 해서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는 잔인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 이런 모욕을 당한 건 자기의 잘못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직무로 인해 이런 고난을 당합니다. 이사야의 직무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로하고, 아침마다 깨어 말씀을 묵상하고, 깨달은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4절에 의하면 그는 여호와께로부터 '학자들의 혀'를 받았습니다. '학자'를 히브리어로 '림무드(דומל)'라고 하는데, 스승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배우는 '제자'를 뜻합니다. 이 '학자'는 탁상공론식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시련을 겪으면서 습득된 체험적 지식을 가진 자입니다. 따라서 이 '학자의 혀'를 지닌 자는 개인적인 지식욕을 만족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한 복판에서 삶의 시련을 온 몸으로 겪어내며 습득된 말씀을 세상에 선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명을 받아 실천한 사람이 왜 그런 모욕과 수치를 당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듣기 싫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싫어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했던 것이 '말씀을 선포하는 것에서 자기 존재의 근거와 이유를 찾았던' 선지자들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자기에게 다가온 고난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을 완전히 맡겼습니다. 때리는 이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이에게 뺨을 맡기고, 침 뱉는 이 앞에서 얼굴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사야 선지자가 모욕과 수치를 이겨내고 선지자로서 자기 길을 다 갈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씀을 '듣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학자'를 뜻하는 '림무드(דומל)'는 말하는 혀 못지않게 듣는 귀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전하는 것'보다 우선인 것입니다. 그 사실은 그의 고백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 사 50:5
이 말씀은 앞에 있는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라는 말씀을 다시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는 이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귀를 열고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마다 이사야의 귀를 열어 귀를 깨우쳐 말씀을 알아듣게 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모욕과 수치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그는 아침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았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 사 50: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그렇습니다. 이사야의 힘은 언제나 주 여호와의 도우심에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선을 위해 싸우다가 고난을 당하는 이들의 처지를 헤아리고 계신 하나님 말씀을 아침마다 경청했기에 그는 모진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표정의 동요 없이 이겨내었고,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말씀묵상과 기도' 즉 수련입니다. 우리 감리회에서 발간한 '매일 기도서'에 따르면 '렉시오(Lectio)' 즉 '성경 읽기'의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려는 것에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성경을 읽는 목적은 단지 성경에서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종국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지음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묵상(meditation)'은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그 말씀의 주변을 거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가리켜 빅토르 위고(Hugh of Saint Victor)는 '마주한 진리의 핵심을 꿰뚫기'라고 표현했고, 묵상의 즐거움은 좋은 벗과의 대화에 흠뻑 빠져드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에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의 사유'라고 했습니다. (스티브 하퍼/정명성 옮김 「매일 기도서」 KMC)
이렇게 '독서'를 통해 받고, '묵상'을 통해 깊이 생각한 말씀들을 '관찰(tem-plari)' 즉 '관상(Contemplation)'함으로써 '기록된 말씀'은 우리 안에서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이러한 영적 노력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침마다 자신의 귀를 열어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룬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 사 50:8
이사야는 늘 이렇게 자신과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보십시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 눅 23: 32, 33
예수님 수난 이야기의 절정은 예수님께서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무법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두 강도가 함께 못 박혔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모욕(侮辱)하려는 목적으로 무법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들의 폭력과 모욕을 받아들이심으로서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사 53:12a) 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당신 안에서 성취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b) 이 말씀은 어떻게 성취되었을까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자신의 길로 가버렸고, 죽기까지 함께 하겠다던 제자들은 달아나버렸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를 환영하던 군중들은 폭력과 음모의 하수인으로 몰락해버린, 그리고 인간의 야만적인 폭력과 모욕이 당신을 향해 자행되던 그 처참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정확하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눅 23:34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게 하신 말씀을 예수님은 당신 희생을 담보로 성취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운명으로 닥친 십자가의 죽음을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받아들이십니다. 구약의 말씀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묘사해 준 그대로의 태도였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신 걸까요? 주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병든 영혼을 치유하시고, 우리와 같아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인간의 상태를 태초의 모습대로 회복시키십니다. 첫 아담은 태초에 기쁨의 낙원에 있었습니다. 죄로 인해 부패하기 전 그는 고상했었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에 떨어진 그는 불행히도 죽음의 올가미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큰 슬픔을 안겨드리고 만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기도는 누구를 위한 기도일까요? 당신을 판 유다와 도망가 버린 제자들이었을까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던 사람들일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b) '많은 사람의 죄' 바로 우리 모두의 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를 위한 기도였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서신서에서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빌 2:9-11
주님은 죽음에 이르도록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최선이었고, 그의 낮춤은 하나님의 높임을 거쳐 우리의 영원한 파스카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능욕을 받았습니다. 십자가는 고독의 끝자락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소외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자리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폭력과 미움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능합니다. 작은 모욕에도 상처받고, 누군가 내게 작은 손해라도 입히면 곧장 사랑의 시선을 거두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영적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과 함께 길을 가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내 가까이 계심을 알고 그 하나님께 영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려면 이사야 선지자처럼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 '알아들음'이 이사야로 하여금 모진 수치와 모욕을 개의치 않고 '고난 받는 종'의 길을 가게 했던 것처럼, 이 '알아들음'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잔인한 폭력과 모욕을 개의치 않고 '수난당하는 어린 양'의 길을 가시게 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깊이 읽고 묵상하고 관상할 때, 우리 역시 그 '알아들음'으로 인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참여하고 주님과 함께 부활의 아침을 맞을 것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말씀에의 경청이 없어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② 말씀과 기도로 이어지는 수련을 통해 세상을 이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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