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사순절 제4주 하나님 몰아沒我의 사랑 안으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수 5:9-12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10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 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 식을 먹었더라 12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 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응송 | 시 32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서신 | 고후 5:16-21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 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 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 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 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 | 눅 15:1-3, 11b-32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 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 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 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 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 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 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 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 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 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 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 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15:24을 묵상하십시오. 지금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스스로 품꾼 을 자처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② 수 5:9을 묵상하십시오. 히브리들이 요단강을 건너 할례를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③ 고후 5:18-20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건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하나님 몰아沒我의 사랑 안으로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갈망(渴望)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갈망을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갈망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본성에 대한 성찰이 깊이 배인 표현입니다. 어쩌면 사순절은 이 본성에 대한 참회의 시간이고, 참회를 통해 인간본성을 극복함과 동시에, 갈망의 심오한 본질을 새로이 발견하는 시간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이 사순절 동안 내가 원하는 것이 참되고 진정한 갈망인가, 아니면 철학자 사르트르의 표현처럼 '무익한 열정인가'를 성찰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치열하게 거침으로써 우리는, 우리 내면에 있는 가장 깊고 참된 갈망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토머스 머튼과 그의 글, 그리고 그의 기도를 교우들에게 여러 차례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수도자로서 20세기 영향력 있는 관상적 영성가 중 한 사람이고, '어느 정도 반항아'라는 평판을 달고 산 사람입니다. 그는 교회개혁을 위해 많은 애를 썼을 뿐 아니라, 당시 사회 속에 만연한 인종차별, 평화, 생태 등 다양한 영역에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관상 비평가로도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토머스 머튼도 처음부터 내면에 깊고 참된 갈망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쓴 '칠층산'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은 단테의 '신곡' 연옥편에서 유래했고, 고백록 형태로 쓰인 책인데, 자신의 내면세계인 영혼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가 자신의 출생과 관련해 첫 장에서 언급한 소회가 인상적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본성은 자유로웠지만 또한 내가 태어난 이 세상의 모습을 따라 횡포와 이기심의 노예이기도 했다. 이 세상은 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인간들,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태어났으면서도 공포와 절망적 자기모순 속에 허덕이며 사는 인간으로 가득 찬 지옥과 같았다. (토머스 머튼/정진석 옮김 「칠층산」 바오로딸. 31쪽)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태어났기에 본성은 자유롭지만 이 세상의 모습을 따라 이기심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이 절망적 자기모순이 어찌 그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따라서 그의 고백들은 하나같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대학 시절에 이미 영문학자요 문학평론가요 시인으로서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고 재즈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의 젊은 날은 그 출중함이 오히려 독이 된 시절이기도 했고, 무익한 열정에 몰입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케임브리지 대학교 클레어 칼리지 시절 사생아를 두어 퇴학당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런 그가 간혹은 자신이 한 일의 부질없음에 대한 수치심과 절망감으로 인해 마음이 우울해지곤 했는데, 그것을 머튼은 자신이 최소한 윤리적으로 살아있다는 것, 즉 자신 안에 윤리적 생활을 할 수 있는 희미한 능력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입증 정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윤리적으로 살아있다'는 말은 자신이 '영적으로는 이미 죽어있다는 사실에 대한 은폐'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채운답시고 한 일이 자신을 텅 비게 했고, 사물을 움켜잡는다는 것이 만사를 잃는 꼴이었다고, 그리고 쾌락과 향락에 탐닉함으로써 실의와 번민만 얻었다고 느낄 무렵, 그의 몸은 이미 병들어 있었고, 마음 또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큰 값을 치르는 동안 그는 점차 참회를 통해 자신의 무익한 열정을 이기고 자기 안에 깊고 참된 갈망을 일구어냅니다. 이 무렵 그가 쓴 고백은 이렇습니다.
인간 존재의 핵심에는 한 가지 역설이 있다. 인간 본성은 그 자체로는 자신의 중대한 문제를 전혀 또는 거의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철학과 윤리 수준만 추종한다면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역설이다. (칠층산. 357쪽)
은총이란 무엇인가?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사랑이다. 곧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은총에 의해 인간은 무한한 몰아(沒我)의 사랑에 참여할 수 있다. (칠층산. 358쪽)
그가 참회를 통해 자신의 무익한 열정을 이기고 자신의 내면에 깊고 참된 갈망을 일구어냄으로써 마침내 은총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했다면,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이 몰아의 사랑의 여러 차원을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에서는 40년 낯선 광야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온 히브리들을 맞이하는 하나님의 속 깊은 사랑이 진득하게 드러나고, 복음서에서는 낯선 타향살이 끝에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속 깊은 사랑이 장면 가득 애틋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모든 자녀들을 향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며 벅찬 가슴으로 축하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 눅 15:11, 12
이 비유의 배경을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린 것(눅 15:2)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자기들 기준으로 부정하다고 판단된 사람들과 식사한다며 수군대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잃었다가 되찾은 양의 비유, 잃었다가 되찾은 은전의 비유, 잃었다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중 세 번째 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에 대해 페트루스의 크리솔로구스는, 큰 아들은 율법을 알고 율법을 따라 살아온 유대인을 의미하고, 둘째 아들은 우상숭배자와 이방 민족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배역에 걸맞게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가운데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살아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무례함을 드러낸 이 아들의 요구는 슬프게도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었지만,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의 마음은 조명하지 않고 건조하게 그 다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 눅 15:12b
아들은 참을성이 없었지만, 아버지는 너그러웠습니다. 혹자는 아버지가 이 둘째 아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의 요구가 무례했던 것만큼 아버지의 너그러움이 역설적으로 드러납니다. 성경은 이후 둘째 아들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 눅 15:13, 14
성경은 그가 먼 나라로 갔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난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으로부터 멀리 떠난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에게서 떠나는 것보다 더 멀리 떠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떠난 사람은 곧 자신의 참 자아로부터 떠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버지께서 이 아들이 방황할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한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타지(他地)에서 경험하게 될 방황과 나락의 아픔을 굳이 막아서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자식 사랑과 얼마나 많이 다릅니까? 아시다시피 아들의 허랑 방탕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재산은 빠르게 없어졌고 궁핍도 빠르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눅 15:15-17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우리는 누가가 전한 이 한 마디 표현에서 그가 처한 궁핍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처한 궁핍은 식량의 궁핍이 아니라 사랑의 궁핍이고 배려의 궁핍이었습니다. 어떤 굶주림이 더 비참합니까? 사랑의 굶주림이 더 비참한 것입니다. 이 궁핍은 그가 아버지를 떠난 결과였습니다. 그 사실은 그의 독백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 눅 15:18-20a
그가 궁핍 중에 떠올린 것은 곡식이 쌓여있는 어느 곡간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궁핍이 다만 육신의 굶주림이었다면 그는 밥을 찾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궁핍이 밥을 먹어서 해결되는 그런 허기가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마 4:4)이라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그의 궁핍은 아버지를 떠난 실존적인 궁핍이요, 말씀에서 떠난 영적인 궁핍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어느 곳이 아닌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는 '아버지께'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난 것이 곧 자신에게서 떠난 것이고, 자신에게서 떠난 것은 곧 하나님에게서 떠난 것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곧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동시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눅 15:18절-20b
아버지는 언제부터 거기 서 계셨을까요? 아들이 떠나던 순간부터였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행여나 누가 방해할 새라 달려가서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달려가는 것은 아버지의 예지(叡智)이며, 껴안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아버지의 인자하심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유산을 나누어줄 때도 인자하셨고, 아들이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할 때도 인자하셨고, 아들이 궁핍해져 돌아올 때도 여전히 인자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줌으로서 그의 변화를 완성시켜줍니다. 탕자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참된 삶이란 아버지 품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할례를 행할 것'(수 5:1)을 명령하신 이후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들에게 할례 산에서 할례를 행합니다(수 5:2). 마침내 모든 할례가 끝나고 각각 자기 진중에서 낫기를 기다릴 때(수 5:3-8),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오늘 구약의 내용입니다.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 수 5:9
길갈이란 '굴리다'란 뜻을 가진 동사 '갈랄'에서 파생된 지명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과정에서 얻은 모멸들과 출애굽하고서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조롱하던 애굽인들의 비난을 멀리 굴려버렸다는 의미가 담긴 지명이겠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있어서 애굽의 수치란 비단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로서 겪은 모욕(侮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 자처한 수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이후에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수 5:6), 애굽에서 배운 우상 숭배에 골몰했고, 원망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어쩌면 애굽에서의 노예살이도 그들에게 수치였지만, 광야에서 그들이 보인 모습은 더욱 큰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길갈에서 할례를 행함으로서 제의적 의미에서 새로 태어났을 뿐 아니라, 그간의 부끄러운 삶을 굴려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가겠다는 결단을 분명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길갈은 지난 40년 동안 출애굽 여정을 걸어온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특별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애굽에서부터 지난하게 그들을 괴롭혀 온 수치가 이 길갈에서 그들로부터 떠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서 떡으로 사는 것 아닌 말씀을 양식으로 살게 되었고, 자기 땅에서 난 소산물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도 수치가 떠나가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제부터'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 고후 5:16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깨달은 이후부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모든 그리스도인은 육체적인 판단 기준을 버리게 됩니다.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은 인간적 기준에 의해 판단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도 회심하기 이전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나 타인을 보는 것에 있어서 철저하게 혈통이나 학벌이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심을 체험한 이후에 그런 기준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회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 '이제부터' 새로운 존재가 된 사람은 판단의 기준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향해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고후 5:17
우리는 과연 새것이 되었을까요? 나의 지성이 새것이 되었을까요? 나의 영성이 새것이 되었을까요? 나의 감성이 새것이 되었을까요? 나의 의지가 새것이 되었을까요? 이 모든 변화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가슴 벅찬 현실입니다. 그 벅찬 현실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 고후 5:18-20
공동번역 성경은 '화목'을 '화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스어로는 '카탈라게'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영성의 가장 바람직한 상태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관계가 회복되고, 마음의 할례를 받아 수치가 떠나가고, '이제부터' 육체적인 판단 기준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 이런 정화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이루어진 상태를 토마스 키팅은 '하나님 테라피'라고 불렀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테라피의 목적은 우리의 진정한 형상을 다시 회복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토마스 키팅/권희순 옮김 「센터링 침묵기도와 영적 여정」은성. 141쪽)
무익한 열정과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거짓 자아를 살찌워 오지 않았습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내면에 깊고 참된 갈망을 회복해야만 하겠습니다. 그 첫 걸음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아버지께 돌아가는 계절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 화해하는 계절입니다. 아버지는 몰아의 사랑으로 우리를 끌어안아주시고, 무익한 열정으로 인해 덕지덕지 내 안에 눌어붙은 애굽의 수치가 떠나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과의 친밀함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부활절은 바로 그 벅찬 행복이 우리 모두 안에 무르익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아버지 마음에 공감하지 못한 채 내 세계를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아버지의 인자하심에 희망을 두고 전심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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