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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마지막 주 하나님의 빛으로 이루는 파스카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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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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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6 18:43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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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마지막 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출 34:29-35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 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3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 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응송 | 시 99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서신 | 고후 3:12-4:2
12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 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 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 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 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복음 | 눅 9:28-36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 할 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 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 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출 34:29을 묵상하십시오.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 까닭은 무엇입니까?
② 눅 9:29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 채가 난 것은 어느 때였습니까?
③ 고후 3:16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은 사람의 완고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벗겨지지 않던 수건이 벗겨지는 때는 언제라고 말씀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오늘은 주현 후 마지막 주일이면서 사순절을 사흘 앞둔 '변화주일'이고, 또한 '3.1운동 103주년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일제가 대한민국의 국권을 강제침탈하고, 마침내 1910년 8월22일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이라고 '한일합병조약(韓日合拼條約)'이 이루어진 이때를, 우리 선조들은 '국권피탈(國權被奪)' 혹은 '경술국치(庚戌國恥)'라 부르며 수치스러워 했습니다. 을사조약 이후 급격하게 기울던 대한제국은 결국 이렇게 일본 제국에 강제 합병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조약 직후 '황현, 한규설, 이상설' 등 일부 관료와 지식인들은 자결을 하거나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서구 열강들은 국제사회에 보내는 조선의 항거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일본의 주권 침탈을 묵인했습니다. 갈수록 엄혹해지는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세력들은 조선반도를 떠나야 했고, 지식인들도 독립에 대해 숨을 죽이던 그때,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이 순식간에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인, 1919년 3월1일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라는 결연한 선언으로 시작된 민족대표 33인의 기미독립선언서가 선포되었습니다. 이후로 3개월간 전국에서 1,500회 만세시위가 있었고, 당시 1,700만 명 인구 중, 연인원 200만 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총인구 1,700만 명 중, 기독교 인구는 23만 명으로 1.3%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이끌어낸 3.1운동은 마침내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독립군을 양성해 일제에 대한 무력투쟁을 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고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 매봉교회 청년이었던 유관순 열사는 마지막 유언에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민족에 닥친 시련 앞에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일제(日帝)의 감언(甘言)에 속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신앙적 원칙에서 민족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독립의 그 날을 맞이할 수 있었고, 103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대한민국이 있게 했습니다. 1919년 3월1일 그리고 103년이 지난 2022년 3월1일 오늘 우리나라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과제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과제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지난 2018년 봄에 시작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노딜' 이후로 유의미한 동력을 얻지 못한 채, 어느덧 미국에서는 바이든 행정부로 정권이 바뀌었고, 대한민국의 문재인 정부는 임기를 다해가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세계 양대 강국으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경쟁은 치열해지고, 그로 인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가 오히려 커져만 가는 상황입니다. 가뜩이나 평화는 쉽게 오지 않는 법인데 한반도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강대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한반도에 온전한 평화를 주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도 우리나라처럼 가슴 아픈 두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산 역사이고, 하나는 바벨론의 포로로 산 역사입니다. 이 두 사건 모두 제국(帝國)과 연관됩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시 우리처럼 작은 나라이다 보니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가기보다는 강대국에 의해 좌우되곤 했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자기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바로는 완고한 마음으로 거절했었습니다. 그러나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 떼가 나일강에서 올라오고, 가축들이 죽어나가는 사태가 이어지면서 결국 바로도 굴복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열 번이나 약속을 어겼습니다. 강대국을 상대로 협상을 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제압하시고, 마침내 출애굽을 통한 이스라엘 해방의 위업을 역사 속에서 이루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해방의 역사, 그것을 '파스카(Pascha)'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파스카 사건은 비단 구약시대 출애굽 사건으로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죄의 속박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시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 역시 파스카 사건입니다. 구약시대의 파스카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히브리들을 애굽의 억압에서 해방시키신 사건이라면, 신약시대의 파스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시키신 사건입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에게 그 파스카로 가는 여정에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영성적 차원'을 보여줍니다. 그 '영성적 차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구약성경에서는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에서 광채가 난 모세의 모습이라면(출 34:29), 복음서에서는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옷에서 광채가 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눅 9:29). 먼저 구약성경을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있는 28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고 당시 모세의 근황을 소개합니다.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집트 시나이 반도에 있는 시내산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보다 중요한 사실은 산이 지니고 있는 상징의 중요성입니다. 시내산은 해발 2,285 미터나 되는 높은 산입니다. 이 산은 풀 한포기 없는 붉은 돌산으로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척박한 산입니다. 그래서 이 산을 두고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존재할 수 없는 산이라 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산'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산에서 모세는 사십 일 사십 야를 홀로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습니다(출 34:28). 그럼에도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것에서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이를 두고 성 마카리우스는 '신령한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세상의 음식이 아닌 천상의 음료를 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천상의 음료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들은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지만, 오로지 하나님과의 대화에만 집중했더니,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이 모세 얼굴의 광채로 나타난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모세가 '성화(聖化)' 된 것입니다. 이 장면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지금 모세는 출애굽한 히브리들을 이끌고 광야를 통과해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합니다. 바로의 거센 추격을 따돌렸다지만, 언제 또 저들이 다시 추격해 올지, 광야의 뜨거운 태양은 어찌 해야 할지, 곳곳에 도사린 적의 위협은 어찌해야 할지, 그 앞에 가로놓인 숱한 난제들이 있습니다. 동역자를 세워 함께 문제를 공유하고 대책을 세우기에도 급박한 중대한 때, 모세는 40일 동안 떡도 물도 마시지 않고 산 위에서 내려오지를 않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보기에 따라 무모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랭 코르뱅이 쓴 '침묵의 예술'에 보면, 중세시대가 절정을 이루었을 때 벌어진 '침묵'과 '섬김' 즉 '이상'과 '실천'에 대한 논쟁을 소개합니다. 이 논쟁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찾은 예수 이야기가 담긴 복음서에 뿌리를 두었습니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움직였고, 마리아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두 자매의 각자 다른 이 모습을 두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런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주님의 발치에서 그 분의 존재와 말씀으로 함양된 내밀한 명상으로 침묵을 유지하는 편이 나은가 아니면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다양한 의무로 분투하는 편이 나은가? (알랭 코르뱅/문신원 옮김 「침묵의 예술」 북라이프. 87쪽)
누가에 따르면, 예수는 첫 번째 선택을 선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 사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번갈아 요구되는 모습인데, 먼저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는 자녀'에게 하나님께서는 바른 방향도 가르쳐 주시고, 섬길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보이는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 엄중할수록 하나님의 산에 올라 말씀에 귀 기울인 당연한 광채라 하겠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빛났던 이 광채가 여러분 얼굴에도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산 위의 사람과 산 아래의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에 백성들은 두려움으로 반응했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빛이 여러분에게 두려움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의 얼굴과 옷에서 빛이 나는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언제 주님의 얼굴과 옷에서 광채가 나게 되었습니까?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을 때', 그리고 '기도하실 때'입니다. 예수님 역시 모세처럼 하나님과 가까이 있을 때,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하나님의 빛이 우리 안에서 빛나게 하려면 예수님처럼,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모세처럼 말씀을 들으며, 때로는 예수님처럼 기도하며, 따로 시간을 구별해서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어두움과 초라함은 극복되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의 광채가 우리 존재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눈 여겨 보십시오. 처음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대화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그 대화의 내용은 '장차 예루살렘에서의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대화가 이루어지고 나서 구름이 한 번 일었다가 두 사람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누가는 '오직'이라는 단어로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진 자리에 예수만 남아있음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모세로 대표되는 구약의 인물들에게 나타났던 빛은 분명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빛이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는 소멸되어야 하는 빛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바로 그 말씀을 합니다.
'장차 없어질 것'은 율법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장차는 소멸되어야 할 빛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경계하기 위해 모세가 수건을 얼굴에 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 시대에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여전히 율법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사도 바울은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 3:15)라고 표현합니다. 모세는 장차 없어질 율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못하게 하려고 얼굴에 수건을 썼었는데, 그들은 그 수건으로 마음을 덮어버리고 그리스도의 빛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느 시대에든 자아를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게 율법이 빛이던 시대에는 율법을 거절했고, 복음이 빛이던 시대에는 복음을 거절했고, 성령이 빛이던 시대에는 성령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는 3.1 운동 103주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사순절을 사흘 앞둔 '변화주일' 예배로 모였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해방의 역사, 그것을 '파스카(Pascha)'라고 한다고 앞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파스카로 이끄시는 분이시고, 동시에 우리의 존재를 파스카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약 3,500년 전 히브리들을 파스카로 이끄신 하나님께서, 103년 전 우리 민족을 파스카로 이끄신 하나님께서, 이제 다시 우리 민족을 파스카로 이끄셔서 한반도에 평화를 주실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얼굴에 빛났던 그 빛이 우리 영혼에 비쳐들어 우리 존재를 채울 때, 우리는 생명의 파스카를 얻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하나님 가장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로 나아가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성 마카리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40일을 금식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음식 외에 다른 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늘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ㅔ 양식이 되었고, 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홀로 몰라갔으나 하나님을 품고 내려왔습니다. 그 영광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서 빛나고 있으며, 부활할 때 그들의 몸은 다른 신령한 옷을 입으며, 하늘의 음식을 먹게 됩니다. (요한 클리마쿠스/최대형 옮김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은성출판사. 12쪽)
맡은 책임이 급할수록, 중대할수록 우리는 말씀의 산, 기도의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이 내 존재를 가득 채울 때까지 그 산에서 내려오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내게서 빛날 때, 그 순간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순간입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부르심에 순종해서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섬겨야 합니다. 그 섬김을 통해 나의 파스카가 완성되고, 그 섬김을 통해 너의 파스카가 완성되고, 그 섬김을 통해 또 다시 100년을 꽃피울 우리 민족의 파스카도 완성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이 그 여정의 시작이기를 축복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수건으로 마음을 덮어버리고 빛 없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안에서 파스카의 은총으로 살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출 34:29-35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 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3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 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응송 | 시 99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서신 | 고후 3:12-4:2
12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 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 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 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 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복음 | 눅 9:28-36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 할 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 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 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출 34:29을 묵상하십시오.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 까닭은 무엇입니까?
② 눅 9:29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 채가 난 것은 어느 때였습니까?
③ 고후 3:16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은 사람의 완고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벗겨지지 않던 수건이 벗겨지는 때는 언제라고 말씀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하나님의 빛으로 이루는 '파스카'
오늘은 주현 후 마지막 주일이면서 사순절을 사흘 앞둔 '변화주일'이고, 또한 '3.1운동 103주년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일제가 대한민국의 국권을 강제침탈하고, 마침내 1910년 8월22일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이라고 '한일합병조약(韓日合拼條約)'이 이루어진 이때를, 우리 선조들은 '국권피탈(國權被奪)' 혹은 '경술국치(庚戌國恥)'라 부르며 수치스러워 했습니다. 을사조약 이후 급격하게 기울던 대한제국은 결국 이렇게 일본 제국에 강제 합병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조약 직후 '황현, 한규설, 이상설' 등 일부 관료와 지식인들은 자결을 하거나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서구 열강들은 국제사회에 보내는 조선의 항거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일본의 주권 침탈을 묵인했습니다. 갈수록 엄혹해지는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세력들은 조선반도를 떠나야 했고, 지식인들도 독립에 대해 숨을 죽이던 그때,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이 순식간에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인, 1919년 3월1일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라는 결연한 선언으로 시작된 민족대표 33인의 기미독립선언서가 선포되었습니다. 이후로 3개월간 전국에서 1,500회 만세시위가 있었고, 당시 1,700만 명 인구 중, 연인원 200만 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총인구 1,700만 명 중, 기독교 인구는 23만 명으로 1.3%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이끌어낸 3.1운동은 마침내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독립군을 양성해 일제에 대한 무력투쟁을 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고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 매봉교회 청년이었던 유관순 열사는 마지막 유언에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민족에 닥친 시련 앞에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일제(日帝)의 감언(甘言)에 속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신앙적 원칙에서 민족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독립의 그 날을 맞이할 수 있었고, 103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대한민국이 있게 했습니다. 1919년 3월1일 그리고 103년이 지난 2022년 3월1일 오늘 우리나라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과제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과제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지난 2018년 봄에 시작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노딜' 이후로 유의미한 동력을 얻지 못한 채, 어느덧 미국에서는 바이든 행정부로 정권이 바뀌었고, 대한민국의 문재인 정부는 임기를 다해가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세계 양대 강국으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경쟁은 치열해지고, 그로 인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가 오히려 커져만 가는 상황입니다. 가뜩이나 평화는 쉽게 오지 않는 법인데 한반도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강대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한반도에 온전한 평화를 주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도 우리나라처럼 가슴 아픈 두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산 역사이고, 하나는 바벨론의 포로로 산 역사입니다. 이 두 사건 모두 제국(帝國)과 연관됩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시 우리처럼 작은 나라이다 보니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가기보다는 강대국에 의해 좌우되곤 했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자기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바로는 완고한 마음으로 거절했었습니다. 그러나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 떼가 나일강에서 올라오고, 가축들이 죽어나가는 사태가 이어지면서 결국 바로도 굴복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열 번이나 약속을 어겼습니다. 강대국을 상대로 협상을 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제압하시고, 마침내 출애굽을 통한 이스라엘 해방의 위업을 역사 속에서 이루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해방의 역사, 그것을 '파스카(Pascha)'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파스카 사건은 비단 구약시대 출애굽 사건으로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죄의 속박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시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 역시 파스카 사건입니다. 구약시대의 파스카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히브리들을 애굽의 억압에서 해방시키신 사건이라면, 신약시대의 파스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시키신 사건입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에게 그 파스카로 가는 여정에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영성적 차원'을 보여줍니다. 그 '영성적 차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구약성경에서는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에서 광채가 난 모세의 모습이라면(출 34:29), 복음서에서는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옷에서 광채가 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눅 9:29). 먼저 구약성경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 출 34:29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있는 28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고 당시 모세의 근황을 소개합니다.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집트 시나이 반도에 있는 시내산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보다 중요한 사실은 산이 지니고 있는 상징의 중요성입니다. 시내산은 해발 2,285 미터나 되는 높은 산입니다. 이 산은 풀 한포기 없는 붉은 돌산으로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척박한 산입니다. 그래서 이 산을 두고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존재할 수 없는 산이라 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산'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산에서 모세는 사십 일 사십 야를 홀로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습니다(출 34:28). 그럼에도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것에서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이를 두고 성 마카리우스는 '신령한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세상의 음식이 아닌 천상의 음료를 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천상의 음료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들은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지만, 오로지 하나님과의 대화에만 집중했더니,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이 모세 얼굴의 광채로 나타난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모세가 '성화(聖化)' 된 것입니다. 이 장면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지금 모세는 출애굽한 히브리들을 이끌고 광야를 통과해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합니다. 바로의 거센 추격을 따돌렸다지만, 언제 또 저들이 다시 추격해 올지, 광야의 뜨거운 태양은 어찌 해야 할지, 곳곳에 도사린 적의 위협은 어찌해야 할지, 그 앞에 가로놓인 숱한 난제들이 있습니다. 동역자를 세워 함께 문제를 공유하고 대책을 세우기에도 급박한 중대한 때, 모세는 40일 동안 떡도 물도 마시지 않고 산 위에서 내려오지를 않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보기에 따라 무모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랭 코르뱅이 쓴 '침묵의 예술'에 보면, 중세시대가 절정을 이루었을 때 벌어진 '침묵'과 '섬김' 즉 '이상'과 '실천'에 대한 논쟁을 소개합니다. 이 논쟁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찾은 예수 이야기가 담긴 복음서에 뿌리를 두었습니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움직였고, 마리아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두 자매의 각자 다른 이 모습을 두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런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주님의 발치에서 그 분의 존재와 말씀으로 함양된 내밀한 명상으로 침묵을 유지하는 편이 나은가 아니면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다양한 의무로 분투하는 편이 나은가? (알랭 코르뱅/문신원 옮김 「침묵의 예술」 북라이프. 87쪽)
누가에 따르면, 예수는 첫 번째 선택을 선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 사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번갈아 요구되는 모습인데, 먼저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는 자녀'에게 하나님께서는 바른 방향도 가르쳐 주시고, 섬길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보이는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 엄중할수록 하나님의 산에 올라 말씀에 귀 기울인 당연한 광채라 하겠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빛났던 이 광채가 여러분 얼굴에도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 출 34:30-32a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산 위의 사람과 산 아래의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에 백성들은 두려움으로 반응했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빛이 여러분에게 두려움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의 얼굴과 옷에서 빛이 나는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 눅 9:28, 29
언제 주님의 얼굴과 옷에서 광채가 나게 되었습니까?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을 때', 그리고 '기도하실 때'입니다. 예수님 역시 모세처럼 하나님과 가까이 있을 때,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하나님의 빛이 우리 안에서 빛나게 하려면 예수님처럼,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모세처럼 말씀을 들으며, 때로는 예수님처럼 기도하며, 따로 시간을 구별해서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어두움과 초라함은 극복되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의 광채가 우리 존재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 새 | 눅 9:30, 31
이 말씀을 눈 여겨 보십시오. 처음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대화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그 대화의 내용은 '장차 예루살렘에서의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대화가 이루어지고 나서 구름이 한 번 일었다가 두 사람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 눅 9:36
누가는 '오직'이라는 단어로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진 자리에 예수만 남아있음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모세로 대표되는 구약의 인물들에게 나타났던 빛은 분명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빛이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는 소멸되어야 하는 빛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바로 그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 고후 3:13
'장차 없어질 것'은 율법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장차는 소멸되어야 할 빛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경계하기 위해 모세가 수건을 얼굴에 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 시대에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여전히 율법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사도 바울은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 3:15)라고 표현합니다. 모세는 장차 없어질 율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못하게 하려고 얼굴에 수건을 썼었는데, 그들은 그 수건으로 마음을 덮어버리고 그리스도의 빛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느 시대에든 자아를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게 율법이 빛이던 시대에는 율법을 거절했고, 복음이 빛이던 시대에는 복음을 거절했고, 성령이 빛이던 시대에는 성령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 고후 3:16
오늘 우리는 3.1 운동 103주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사순절을 사흘 앞둔 '변화주일' 예배로 모였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해방의 역사, 그것을 '파스카(Pascha)'라고 한다고 앞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파스카로 이끄시는 분이시고, 동시에 우리의 존재를 파스카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약 3,500년 전 히브리들을 파스카로 이끄신 하나님께서, 103년 전 우리 민족을 파스카로 이끄신 하나님께서, 이제 다시 우리 민족을 파스카로 이끄셔서 한반도에 평화를 주실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얼굴에 빛났던 그 빛이 우리 영혼에 비쳐들어 우리 존재를 채울 때, 우리는 생명의 파스카를 얻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하나님 가장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로 나아가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성 마카리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40일을 금식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음식 외에 다른 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늘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ㅔ 양식이 되었고, 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홀로 몰라갔으나 하나님을 품고 내려왔습니다. 그 영광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서 빛나고 있으며, 부활할 때 그들의 몸은 다른 신령한 옷을 입으며, 하늘의 음식을 먹게 됩니다. (요한 클리마쿠스/최대형 옮김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은성출판사. 12쪽)
맡은 책임이 급할수록, 중대할수록 우리는 말씀의 산, 기도의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이 내 존재를 가득 채울 때까지 그 산에서 내려오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내게서 빛날 때, 그 순간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순간입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부르심에 순종해서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섬겨야 합니다. 그 섬김을 통해 나의 파스카가 완성되고, 그 섬김을 통해 너의 파스카가 완성되고, 그 섬김을 통해 또 다시 100년을 꽃피울 우리 민족의 파스카도 완성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이 그 여정의 시작이기를 축복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수건으로 마음을 덮어버리고 빛 없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안에서 파스카의 은총으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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