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주현 후 제7주 우수 뒤의 얼음같이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창 45:3~11, 15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 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 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 게로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 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응송 | 시 37:1-11
1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 기하지 말지어다 2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 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 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서신 | 고전 15:35-38, 42-50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 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 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 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 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 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 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 의 형상을 입으리라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 하느니라
복음 | 눅 6:27-38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 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 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 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 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 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 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45:5을 묵상하십시오. 요셉은 자신이 애굽에 팔려온 까닭이 무엇 때문이라고 고백합니까?
② 눅 6:35을 묵상하십시오.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는 자'에게 예수님 께서 약속하시는 두 가지 복은 무엇입니까?
③ 고전 15:48을 묵상하십시오. '흙(아담)'에 속한 자는 어디에 속하고, 하늘(예수님)께 속한 자는 어디에 속한다고 말씀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우수雨水 뒤의 얼음같이
교회력으로 주현 후 제7주를 맞은 오늘, 24절기로는 봄 절기인 우수(雨水)를 지나고 있습니다. 지나간 주에는 하루건너 날씨가 영하를 밑돌기도 해서 아직 봄이라 하기에는 느낌이 잘 들지를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느낌마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계절은 시나브로 봄을 농익혀 갑니다. '우수 뒤의 얼음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꼬일 대로 꼬인 매듭들이 우수를 기점으로 눈, 얼음, 서리가 녹듯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표현인데, 우리 사회 곳곳에 맺혀 있는 감정의 매듭들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악화된 감정의 매듭들도 '우수 뒤의 얼음같이'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대동강보다 한 번 얼어붙으면 더 녹이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회적 동물이면서 감정의 동물이기도 한 사람은 사회 속에 섞여 살면서 사람들과의 이런저런 감정의 부딪힘을 겪는데, 그 과정에서 사랑과 연대의 감정도 생겨나지만, 섭섭함과 분노의 감정을 가슴에 쌓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우리 가슴에 쌓인 이런 다양한 감정들을 어떤 자세로 처리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눅 6:27)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마땅한 자세이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나의 믿음의 바로미터이며, 더 나아가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주는 선교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모범을 오늘 구약성경에서 봅니다. 자기들이 애굽 상인에게 팔아버린 동생을 알아보고 형들이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 때, 요셉이 한 말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형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비정한 사건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받아들이는 그 신앙의 헤아림은 요셉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바로 선 지표이고, 형들마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선교적 사건이 되게 했습니다.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흙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를 구분합니다(고전 15:47-49). 첫 아담은 '자기 의지'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서, 영영 흙에 속한 자로 살아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아담은 하늘에서 나셔서 '자기 의지와 고집'을 포기하심으로서, 영원히 하늘에 속하신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이웃과 형제를 대하는 감정과 태도에 있어서도 내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의 여부는 내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고 살아가느냐를 가르는 중대한 분기점이 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복음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눅 6:27, 28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병행을 이루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가르치시는 교훈임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세속인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를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잘 표현해 놓았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4-21)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전한 이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좀 더 세밀하게 표현한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훈이겠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에 우리 모두의 고민이 있습니다. 누가의 설명에 따르면 원수는 나를 미워하는 자이고, 저주하는 자이고, 모욕하는 자입니다. 사랑하기에 너무 버거운 존재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는 고통, 누군가에게 저주 당하는 고통, 누군가에게 모욕당한 상처로 인해 밤잠을 못 이룬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대상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은 신앙을 이유로 긍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눅 6:29-31
이런 상황 설정은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 하나같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의의 공격에는 당연히 분노와 보복으로 반응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더욱이 29절에서의 '뺨'에 해당하는 헬라어 '시아곤'은 '턱'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 표현은 단순히 모욕을 주기 위한 폭력을 넘어 몸에 손상을 입히려는 의도가 다분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향해 다른 뺨을 내주라는 것은, 자신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행동을 단순히 참아내는 것을 뛰어 넘어 사랑으로 덮어주라는 의미입니다.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같은 상황에 모세의 율법은 비교적 현실적인 대응을 권장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4, 25) 이 율법은 부당하고 과한 보복을 방지하면서도 합당한 처벌을 허락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게는 심정적으로 합리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시리아의 성 에프렘은 이렇게 말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정의의 완성입니다. 하지만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을 돌려대라는 것은 사랑의 극치입니다. 출애굽기의 율법이 시작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끝인 셈입니다. 시작과 끝은 서로 별개인 듯 보이지만 깊이 보면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Ⅳ. 분도출판사 190쪽)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만,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를 넘어서서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마틴 슐레스케에 의하면 '수난'은 고통과 사랑이 함께 녹아있는 말이라고 합니다.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는 의미인데,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기에 고통스러운가요? 사랑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 포기가 없이는 사랑이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사랑을 추구하면서 사랑받는 존재에게 고통당할 각오가 없다면, 사랑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을 택한 사람의 삶은 고통의 길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받는 고통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마틴 슐레스케/유영미 옮김 「가문비나무의 노래」 니케북스. 126쪽)
테르툴리아누스는 스카풀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관습이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만의 관습이지요."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향한 솔로몬의 사랑에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아 2:4)라며 감격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계명에 순종할 때, 그 사랑은 우리의 형제와 이웃들 위에 깃발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을 향한 나의 분노의 감정이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 분노의 감정이 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주님의 계명이기 때문에 사랑하려는 것은 자칫 자기감정을 향한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 태생으로 중국에서 선교했던 판토하(Diego de Pantoja, 龐迪我) 선교사가 성 그레고리오의 말을 인용해 이런 말을 합니다.
분노는 모든 악의 대문이다. 이를 닫아야 모든 덕이 그 거처에서 편안해진다. 이 때문에 마음에 인내가 있는 것은 어른이 집에 있어 온갖 일이 차분하게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인내라는 주인이 한 번 떠나가면, 마음은 성을 내고 눈은 부라리며 혀는 마구 떠들고 얼굴은 사납게 된다. 손은 흥분하고 몸은 마구 떨려, 모든 일이 한꺼번에 어지러워진다.
(판토하/정민 옮김 「칠극」 김영사. 282쪽)
결국 이 분노의 감정을 해결하지 않으면, 그것은 분노의 대상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영혼을 위해서도 이 분노의 감정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아낄 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마땅한 자세이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나의 믿음의 바로미터이며, 더 나아가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주는 선교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 나와 더불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갈 때만, 내 용서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그런 사람이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형들의 미움을 사서 무정하게 버림당하고 애굽으로 가던 이스마엘 상단에 은 20세겔에 팔려서 기막힌 세월을 산 요셉이라는 사람입니다. 이후로 애굽에서 살아낸 그의 서사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합니다. 39장에서 그는 노예시장에 끌려가 보디발이라는 사람에게 팔려갑니다. 40장에서는 팔려간 집의 여주인에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렇게 2년간의 감옥 생활을 하던 요셉은 이집트에 불어올 7년간의 풍년과 뒤 이을 7년간의 흉년을 예언함으로서 애굽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당시 '온' 즉 '헬리오 폴리스' 제사장이던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7년간의 흉년으로 고대근동의 가뭄이 깊어가자 요셉을 애굽에 팔아넘겼던 형들이 곡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앞에 엎드린 형들을 보았을 때,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요셉은 짐짓 모르는 체 하며 형들을 대하면서도 형들 곁을 떠나 울고(창 42:24)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낯선 땅에서 보란 듯이 살아남았고, 당대 최강대국인 이집트의 권력자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가슴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것입니다. 다행히 요셉은 형들을 시험해보는 과정에서 그들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보게 됩니다. 형들 중 유다는 자기 앞의 요셉을 못 알아본 채, 과거 요셉에게 범했던 일을 범죄라 하면서(창 42:21a), 그로 인해 자신들에게 괴로움이 임했다며 후회합니다. 자신들과 배 다른 형제인 막내 베냐민을 애굽에 억류해 두고 형들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요셉이 허락했을 때도(창 44:17), 형 유다는 요셉 앞에서 눈물겨운 탄원을 하며(창 44:18-32), 자신이 베냐민 대신 애굽에 남아 있겠다고 합니다(창 44:33). 요셉은 더 이상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웁니다. 그 소리가 바로의 궁에도 들릴 정도였습니다.(창 45:1, 2) 그의 울음은 그 동안 가슴에 쌓인 상처들이 형들의 변화 앞에서 치유된 울음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요셉은 형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데, 정작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참된 힘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창 45:5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결정적 힘은 그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요셉은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시작했던 것이고, 그 헤아림이 그의 일생을 이끌어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형들에게 한 고백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만이 아닌 아버지와 형들의 생명까지 돌보심을 깨달았습니다. 이어지는 고백도 보십시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 창 45:6-8
이런 신앙의 안목이 설 때, 우리 역시 상처와 분노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고 복수하는 일에 몰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면에 쌓인 원망이나 분노를 감정 그대로 풀어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그 헤아림으로 풀어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애초부터 용서도 불가능하거니와 용서를 통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형제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새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지난 주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우리 믿음을 진단한 바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사도 바울에 따르면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인 인생'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 상태에 머물고 말면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뿐 아니라, 하나님과 형제의 관계도 망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눈을 감아버리면 우리 자신의 신앙도 성화에 이르지 못할 뿐 아니라 신앙의 형제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이어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간곡하게 당부합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 고전 15:45-50
창세기에 등장하는 첫 사람 아담 이야기의 본질은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 즉 '자기 의지의 고집'과 '자기 의지의 포기'에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자기 의지'를 포기하지 못해 영영 흙에 속한 자로 살아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마지막 아담은 '자기 의지와 고집'을 포기하심으로서, 영원히 하늘에 속하신 분이 되십니다. 우리가 이웃과 형제를 대하는 감정과 태도에 있어서도 내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의 여부는 내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고 살아가느냐를 가르는 종대한 분기점이 될 수 있겠습니다. 끝내 '자기 의지와 고집'을 포기하지 못하고, 분노의 감정 그대로 내 형제를 대하고 말면, 우리는 여전히 '흙에 속한 자'로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의지와 고집'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형제를 사랑하면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습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부활로 사는 삶입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흙에 속한 나'를 심고, '하늘에 속한 나'로 사는 것입니다. '썩을 나'를 심고 '썩지 아니할 나'로 사는 것이며, '욕된 나'를 심고 '영광스러운 나'로 사는 것이며, '약한 나'를 심어 '강한 나'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 고전 15:44
여러분은 어떤 몸으로 사시겠습니까? 영의 몸으로,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우수 뒤의 얼음같이 육의 몸이 녹아내리고, 봄날 풀꽃처럼 새로이 돋아난 영의 몸으로 이 계절을 사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상처와 불행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사랑의 계명에 순종해 주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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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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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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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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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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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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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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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