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주현 후 제6주 마음을 가꾸는 사람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렘 17:5-10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 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 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응송 | 시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 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서신 | 고전 15:12-20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 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 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 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 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 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 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 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복음 | 눅 6:17-26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 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 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 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 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렘 17:6, 8을 각각 묵상하십시오.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힘을 삼은 마음과, 여호와를 의지하며 의뢰하는 삶의 결과는 각각 어떻습니까?
② 눅 6:20을 묵상하십시오. 가난한 사람, 혹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받는 복은 무엇입니까?
③ 고전 15:19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인임에도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인 사람을 향해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마음을 가꾸는 사람
신(新) 신학자 성 시메온은 AD 949-1022년까지의 인물로 콘스탄티노플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를 공부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는 27세부터 가파도기아의 두 평 남짓한 바위굴에서 독거하며 은수(隱修) 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정확하게 천 년 전이지만, 그가 고심했던 주제들은 우리시대에도 여전히 신선하게 마음을 파고듭니다. 그는 '마음의 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가 말한 '마음의 주의'는 하나님과 현재의 상황 둘 다에 생생하고 동시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인데, 그가 마음의 주의를 중요하게 여겨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 없이는 내적 힘을 얻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상적 차원의 알아차림 자체만으로는 복음을 실천하는 데 무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 알아차림이 마음에까지 전달되어 '마음 안에'서 공감될 때, 위선과 탈진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개념에 머물지 않고 마음에 내려와 잠기고, 그리하여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에고(ego)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성 시메온이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자기 생각이 돌아다니는 것을 멈추게 하라'는 것입니다. 대개 생각이라는 것이 머리에서 돌아다니는데, 악한 생각들은 마음속에서 일어난다는 현실, 그래서 시메온은 '마음의 주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주의를 위해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가장 오래 실천해 온 수련방법은 '헤지키아(hesychia)' 수련입니다. 헤지키아란 '고요(적정 stillness)'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순수기도의 실천과 마음의 지성을 지킴으로써 깊어지는, 내적 고요 혹은 마음의 평정과 집중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고요' 혹은 '적정(寂靜)'의 상태는 하나님 말씀을 귀 기울여 경청하는 태도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둔 상태입니다. 이러한 영성수련 전통을 헤지카즘이라 하고, 이러한 영성수련을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켜 헤지카스트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성수련을 이끌어온 교부들의 금언을 모아놓은 책을 '필로칼리아'라고 하는데, 독수도사 성 이사야가 필로칼리아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육체 안에 있는 동안에는 마음을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농부가 곡식을 수확하여 창고에 들이기 전까지는 밭에서 자라는 곡식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듯이 우리도 코로 숨을 쉬며 사는 동안에는 결코 마음을 지키지 않은 상태로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어떤 정념이 우리를 공격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숨이 붙어있는 한 마음을 무방비 상태로 버려두지 말고, 매순간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를 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성산의 성 니코도모스/엄성옥 옮김 「필로칼리아 1」 은성출판사 24쪽)
육체로 있는 동안 마음을 무방비 상태로 버려두지 말고 '정념' 즉 '악한 집착'들로부터 지켜내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 역시 우리에게 마음을 잘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은 우리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여줍니다. 그는 두 종류의 사람을 비교합니다.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렘 17:5)과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렘 17:7)입니다. 먼저 그는 전자의 사람들 즉 육체의 힘을 숭상하며 여호와에게서 마음이 떠나버린 사람들을 향해서는, 그들은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소금 땅 황무지에서 사는 저주를 받는다(렘 17:6)고 경고합니다. 그런가 하면 후자의 사람들 즉 여호와를 믿고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그들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않는 복을 받는다(렘 17:8)고 축복합니다. 여기서 그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 5절의 말씀을 표준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마음'은 우리 존재의 가장 심층적인 곳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도 '마음'이고, 주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도록 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구약시대의 심리학에서도 인간의 마음은 생각과 행동의 원천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시인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라고 기도했고,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사람들만 '마음'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닙니다. 주님 역시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 5:3) 라고 말씀하셨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 5:8)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막의 교부들도 이 '마음'을 사로잡아 동요시키는 것들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무수하고 다양하다고 보고 '마음'과 '생각'과의 싸움을 영성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필로칼리아에서 압바 마가는 니콜라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당신의 마음이 정신적인 빛과 영적 지식을 획득하여 이 세대의 어두운 밤을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기를 원한다면, 또 당신이 복음의 길에서 즐거워하며 주님이 당신의 발걸음을 정해주시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될 놀라운 영적 방법을 가르쳐 주겠습니다. 여기에는 육체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노력과 지성의 통제와 깊은 사고력,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정념들을 정복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당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십시오.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가서 망각과 나태와 무지라는 세 가지 힘센 용사들을 찾아내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주의를 집중하고 지성을 통제하며 위로부터의 도움을 받아 그것들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필로칼리아 4. 288-289쪽)
성 요한 클리마쿠스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내가 잘지라도 마음을 깨었는데"(아 5:2)라고 말하는 사람이라 했고(필로칼리아 4. 289쪽), 시리아의 성 이삭은 "마음의 성소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늘의 성소를 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성소와 하늘의 성소는 동일한 것이며, 그것을 보게 해주는 입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이어지는 사다리는 당신의 마음, 즉 당신의 영혼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필로칼리아 4. 292쪽) 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는 노력은 구약시대의 사람들부터 사막의 교부들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기만 했고,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이 노력은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참 생명의 가치는 '자기를 넘어설 때' 빛이 납니다. 자기를 넘어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 때부터 참 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구약성경은 종종 두 종류의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저주의 길이고, 하나는 복의 길입니다. 오늘 말씀도 5-6절과, 7-8절을 서로 대조하며 저주를 받을 사람과 복을 받을 사람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에 따르면 저주를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특징이 있는데,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사람을 더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레미야의 경고를 듣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믿고 의지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치적인 동맹이나 육체의 힘을 더 신뢰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정치적 동맹을 더 의지하고, 자기 육체의 힘을 숭상하는 그것이 우상숭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예레미야의 말씀에 의하면 그렇게 마음을 우상으로 채워버린 사람들에게 주어진 저주는 참담합니다.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 렘 17:6
여기 '간조한 곳'이란 히브리어로 '하레림(םיררח)'인데, '용암 밭', '암석사막'을 뜻하고, 그 어떤 작물을 심어도 불탈 정도로 불볕으로 인해 바싹 메마른 땅입니다. '건건한 땅'이란 '에레츠 멜레하(החלמ ץרא)' 즉 염분으로 인해 생물이 살 수 없는 땅입니다.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사람을 더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런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력자를 따르거나, 유력한 집단에 속해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려고 했던 결과는 그토록 참혹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반대의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 렘 17:7
이 사람은 5절에 언급된 사람과 대조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마음에 사람을 두지 않고 하나님을 모시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도 대조적이었습니다.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사막의 떨기나무'로 비유되었습니다. 이 '사막의 떨기나무'는 8절에서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으로 비유된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차이가 있습니다. 떨기나무는 가뜩이나 사막에 심겨졌는데, 뿌리마저 깊이 내리지 못해 죽고 맙니다. 그러나 '물가에 심어진 나무'는 뿌리를 물속으로 깊이 내려서, 무더위가 닥쳐와도 잎이 언제나 푸르고, 가뭄이 심해도 언제나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자신의 경험이었습니다. 렘 15:18에 의하면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마치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 같으신 분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그가 자신의 힘을 의존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메마른 샘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여호와를 의지하며 의뢰할 때는 하나님은 그에게 풍성한 시냇물 같았습니다. 중요한 건 마음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심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 렘 17:9, 10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임을 볼 때, 그 마음이 부패했다는 건 참 슬픈 진단이지만, 나의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니 변명조차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으로 표현된 히브리어 '레브(בל)는 그대로 '마음'을 뜻하고, '폐부'로 표현된 히브리어 '킬르야(הילכ)'는 '콩팥'을 뜻하는데, 옛 사막의 수도자들은 이 콩팥에 인간의 의지, 양심, 감정이 머문다고 보았고, 심장은 생각과 지성의 자리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여드리고 싶어 하는 것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애써 감추고 싶어 하는 마음속의 생각까지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겉치장을 드러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살피십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겉치장이 아닌 마음부터 경작해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 눅 6:20-22
이 말씀은 마 5:3-12에 있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누가가 본 시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는 '가난한 자' 앞에 '마음'을 덧붙여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 5:3 공동번역)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누가는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전해줍니다. 두 복음서간의 표현의 차이에 대해 이런저런 해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두 복음서의 표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해도 의미의 큰 변화는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마음이 가난한 자이든, 성경은 모두를 향해 "복이 있다"고 선언해 줍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가난이 예수의 관심이 되고, 그 관심이 하늘의 복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가난함이란 경제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이미 그 자체로 하나님을 향해 절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절실한 바로 그 '마음'을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을 향해 절실한 마음만이 하나님께 정직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절실한 마음이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처럼,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절실한 마음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고전 15:19, 20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인 인생', 그보다 더 허무한 인생이 어디 있을까요? 그는 천국을 모르기 때문에 다만 이 세상을 바랄 것이고, 부활을 모르기 때문에 다만 육체만을 바랄 것입니다. 그처럼 조바심 나고, 불행한 인생이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국이 가까워 오고, 부활이 가까이 와야 행복할 수 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죽음이 내게 다가오고, 그 죽음 이후는 정처 없는 인생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비극인 인생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이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주목해서 보면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인 인생'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신앙인의 이름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그는 세상에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그 마음을 온통 공허함에 내어준 채, 사람이 나의 힘이 되어 주려니 해서 사람을 우상으로 삼고, 육체의 힘과 권력으로 힘을 삼기 위해 온통 마음 밖 세상을 탐하며 분주하게 돌아다닐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중심은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성소를 가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마음의 친교를 강조했던 앤드류 머레이는 남아프리카의 오렌지 나무를 해치는 질병으로 '뿌리병(root disease)'이라는 병을 소개합니다. 이 병에 걸린 나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열매를 맺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나무가 병들었는지 눈치를 채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문가는 그 나무에서 느린 죽음의 서곡을 듣습니다. 혹 오늘 내 삶이 건강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마음을 꼼꼼히 살펴야 합니다. 오늘 응송에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 시 1:1-4
병 든 나무의 문제가 보이지 않는 뿌리에 있는 것처럼, 사람의 문제도 보이지 않는 마음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마음의 뿌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내리고, 자기의 마음을 말씀의 샘물로 채울 것입니다. 그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뿌리째 병든 사람은 악인의 꾀에 자꾸 마음을 빼앗기고,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탐합니다. 그 존재는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이 허무할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찌할 것입니까? 부디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무방비 상태로 버려두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고, 가슴으로 묵상하며, 마음의 성소(聖所)를 통하여 하나님과 접속해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내 힘을 삼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②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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