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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4주 영적 어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1-29 13:28
조회
1121
주현 후 제4주-영적 어른주현 후 제4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렘 1:4-10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 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 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 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응송 | 시 71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서신 | 고전 13:1-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 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 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 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 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 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 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 일은 사랑이라
복음 | 눅 4:21-30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 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 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 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렘 1:9을 묵상하십시오. 스스로를 '아이'로 여기며 자신 없어 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② 눅 4:22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이 읽어주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리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③ 고전 13:11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에게 있어서 어렸을 때와 장성한 이후의 변화는 어디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사막의 지혜-사막 교부들의 말씀'에 가진 것이라고는 성경밖에 없던 세라피온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자기의 유일한 재산인 성경을 가난한 이들을 먹이기 위해 팝니다. 그리고는 기억해 둘만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라고 내게 명하신 바로 그 말씀마저 팔았다네." 다소 엉뚱하게 느껴지는 일화이지만, 말씀이 자기 안에 성육(成肉)된 좋은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함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하나가 영성형성 훈련이라면, 그 영성형성 훈련 여정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 있는 온전함을 우리도 이룰 수 있는 자양분을 성경 말씀 안에 마련해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관상하는 중에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장해 갑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일제히 말씀의 소중함과, 말씀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성찰하게 해줍니다. 구약성경에서 예레미야는 선지자에로의 소명이 자신에게 임했을 때(렘 1:4), 매우 당혹해하며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렘 1:6 공동번역)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마음과 달리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 1:7) 하시고, 심지어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렘 1:9)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소명 앞에 둔 이사야의 심정과 그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말씀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점검해보게 됩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라고 고백합니다. 그에게 있어 '어렸을 때'라는 것은 말씀을 몰랐던 시절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몰랐을 때는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지만, 말씀을 안 후에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말씀의 소중함을 새삼 환기시켜줍니다. 복음서에서 누가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읽어주신 후에 사람들이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눅 4:22a)라고 당시의 반응을 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그 말씀을 떠나고 맙니다. 오히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22b)라며 예수의 혈통을 문제 삼을 뿐 아니라, 예수를 낭떠러지에서 밀어 죽이려고까지 합니다(눅 4:24-29).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려온 말씀에 마음으로 영으로 반응하는 것은 더 중요한 과제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2절을 보면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것은 유다 왕 요시아 제 13년(BC 627년)이었습니다. 왕하 22-23장에 따르면, 요시아 왕은 왕이 된지 18년 되는 해(BC 622년)에 성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율법 두루마리의 말씀을 따라 온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하고, 예루살렘을 비롯해 전 유다 땅 안에 있는 모든 이방 우상(偶像)을 부수게 하고, 거기 종사하던 제사장들을 내쫓는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것이 요시야 제 13년임을 생각할 때, 예레미야의 예언은 요시야의 개혁이 있기 5년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때의 남 유다가 이미 망해버린 북이스라엘보다 더 악했다고 하는데, 그 사실은 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셨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조국 유다의 어둠이 깊어갈 때, 예레미야를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택하시기 전, 그에 대한 '앎'이 먼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그의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아셨고, 그 앎을 토대로 그를 성별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창조의 신비에로 이끌어 갑니다. M. 로버트 멀홀랜드의 표현을 따르면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여 존재하게 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창 1:26) '말씀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는데, 사람의 마음도 하나하나 지으셨기에(시 33:15) , 하나님은 이미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예레미야를 속속들이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레미야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알고 택하셨는데, 예레미야는 스스로를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대답이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대답을 보면서 그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창세기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 당신의 거룩하신 말씀과 손으로 당신 신성의 너울을 만드실 때, 하나님 마음이 부끄러우셨을까요? 혹은 당신의 창조물이 완전하지 못해 당신 스스로도 미덥지 못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어머니의 태(胎)에 나를 지으실 때,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토대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순명할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빼닮은 영적 저력이 나에게서 발휘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지으실 때 내 마음도 지으신 하나님, 내 마음이 당신 형상을 닮게 하신 하나님을 잊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고, 겸손을 가장한 불신앙에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을 '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나 '나는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에 나는 아직 영적 소양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레미야의 이런 고백은 엄혹한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잘 알기에 하는 말입니다. 어디 예레미야뿐입니까? 모세도 처음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실 때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출 4:10)라며 당혹스러워 한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고후 11:6)라며,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의 부담감을 솔직하게 토로한 바 있습니다. 심지어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를 '입술이 부정한 사람'(사 6:5)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결국 이런 반응들은 무얼 말하는 겁니까?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잘 전하는 것도 참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에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오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당시 회당예배의 전통대로 성경을 읽어주시는데, 사 61:1 이하의 말씀을 읽어주시는 걸 보았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8:18, 19).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읽어주신 이유는 "내 사명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 누가는, 예수님께서 읽어주신 말씀을 들은 이후,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감탄할 만큼 말씀에 은혜를 받았으면, 그 다음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그 말씀을 굳게 붙잡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전하는 '말씀'에 마음을 열어 반응하기보다는 요셉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사소한 면에 더 관심을 보입니다. 자기의 의식 안에 뿌리내린 관점의 틀이 자신의 감옥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여 존재하게 된 사람으로서, 말씀이 자기존재의 재질이요 고향인 자로서, 너무 아쉬운 반응입니다. 창조의 신비에서 멀어진 길을 너무 오랫동안 걸어온 듯합니다. 심지어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렙다의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예를 들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들을 책망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를 낭떠러지에서 밀어 죽이려고까지 합니다.(눅 4:24-29) 말씀을 들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부담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심지어 당시 민감한 정치적 상황 안에서 받았습니다. 사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해야 할 말씀은 당시 유다인들 뿐 아니라 왕이나 귀족들도 듣고 싶지 않아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북쪽 강대국들의 군대가 쳐들어올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니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여라"(렘 1:11-15)라고 전해야 합니다. 누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겠습니까? 실제로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전했을 때,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계속해서 예언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정말 가능하다면, 말씀도 선지자의 소명도 다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심정에는 아랑곳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겸양이 아닌 회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파고드는 두려움은 어찌할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들'은 유다의 최고 권력자인 왕과 관료들입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아나돗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과의 접경지역 사람으로 남 유다의 주류계층에 속하지 못한 변두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예레미야로서 두렵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인들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향한 소명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그리고 당신의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을 상기시키게 됩니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신 18:18) 과거 모세에게 주셨던 말씀 그대로, 다시 예레미야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결단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그가 처한 상황은 녹록치 않습니다. 그를 비판하는 소리도 험악하기만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냐'라는 궁중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예레미야와 완전히 다른 예언을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유다 민족이 완전히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갈 것이라고 예언할 때,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치시고 유다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을 거라며, 거짓된 메시지로 유다민족을 위로했습니다. 사람들이 누구의 말을 더 들으려 했을지 불을 보듯 뻔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입에 두신 말씀 그대로 전합니다. 그는 비로소 아이를 극복하고 성숙한 영적 어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입에 두신 당신 말씀을 불이 되게 하셨고(렘 5:14), 유다 사람들은 나무가 되어 말씀에 불살라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고집하며, 언어생활 대부분이 말씀에서 비켜 선 어른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니면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들려온 말씀을 끌어안고 전하는 가운데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있는 것일까요?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아이 같던 시절은 있었습니다. 그 아이 같은 시절이라는 것이 정말 나이가 어렸던 시절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확신이 지나쳐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핍박자요 포행자인 사울이었을 당시를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렸을 때, 그 때의 특징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다." 어린 아이의 지식은 자기중심적이고, 주관적이며, 감각적입니다. 반면에 성숙한 성인은 비교적 이타적이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자세를 추구합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의 언어와 감정과 생각을 버리고, 사려 깊고 반듯한 어른으로 성숙해 가야 하는 것은 육체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버렸노라' 라고 표현한 단어는 헬라어로 '쓸모없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어린 아이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쓸모없는 말이고 생각이고 행동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삶속에서 완전히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응송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모태에 시인을 지으시기 전에, 자신에 대한 '앎'이 먼저 있었음을 시인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고, 지금도 항상 주를 찬송할 것이라는 그의 고백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물론 이 고백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백과 같이 어려서부터 말씀에 의해 교훈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종일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 수 있었고, 종일 주의 공의를 전하는 삶을 살 수 있었고, 종일 주의 구원을 말하는 삶을 살 수 있었고,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M. 로버트 멀홀랜드에 의하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이십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말씀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갑니다. 이 이중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일치를 지향하는데,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마침내 우리로 그리스도의 존재와 행위를 닮아가도록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영성형성의 본질입니다. 이번 한 주 안에는 설날과 입춘(立春)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한 살씩 나이가 들며 성숙해지는 것도, 봄이 오면 꽃 틔울 준비를 하는 것도, 철든 사람의 마땅한 모습이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영적으로 철이 드는 것입니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하기보다 "내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고 고백하며, 설날도 입춘도 맞으시기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아이와 같은가?
②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말씀 안에서 성숙해 가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렘 1:4-10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 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 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 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응송 | 시 71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서신 | 고전 13:1-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 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 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 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 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 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 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 일은 사랑이라
복음 | 눅 4:21-30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 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 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 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렘 1:9을 묵상하십시오. 스스로를 '아이'로 여기며 자신 없어 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② 눅 4:22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이 읽어주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리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③ 고전 13:11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에게 있어서 어렸을 때와 장성한 이후의 변화는 어디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영적 어른
'사막의 지혜-사막 교부들의 말씀'에 가진 것이라고는 성경밖에 없던 세라피온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자기의 유일한 재산인 성경을 가난한 이들을 먹이기 위해 팝니다. 그리고는 기억해 둘만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라고 내게 명하신 바로 그 말씀마저 팔았다네." 다소 엉뚱하게 느껴지는 일화이지만, 말씀이 자기 안에 성육(成肉)된 좋은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함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하나가 영성형성 훈련이라면, 그 영성형성 훈련 여정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 있는 온전함을 우리도 이룰 수 있는 자양분을 성경 말씀 안에 마련해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관상하는 중에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장해 갑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일제히 말씀의 소중함과, 말씀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성찰하게 해줍니다. 구약성경에서 예레미야는 선지자에로의 소명이 자신에게 임했을 때(렘 1:4), 매우 당혹해하며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렘 1:6 공동번역)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마음과 달리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 1:7) 하시고, 심지어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렘 1:9)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소명 앞에 둔 이사야의 심정과 그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말씀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점검해보게 됩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라고 고백합니다. 그에게 있어 '어렸을 때'라는 것은 말씀을 몰랐던 시절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몰랐을 때는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지만, 말씀을 안 후에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말씀의 소중함을 새삼 환기시켜줍니다. 복음서에서 누가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읽어주신 후에 사람들이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눅 4:22a)라고 당시의 반응을 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그 말씀을 떠나고 맙니다. 오히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22b)라며 예수의 혈통을 문제 삼을 뿐 아니라, 예수를 낭떠러지에서 밀어 죽이려고까지 합니다(눅 4:24-29).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려온 말씀에 마음으로 영으로 반응하는 것은 더 중요한 과제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 렘 1:4
바로 앞에 있는 2절을 보면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것은 유다 왕 요시아 제 13년(BC 627년)이었습니다. 왕하 22-23장에 따르면, 요시아 왕은 왕이 된지 18년 되는 해(BC 622년)에 성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율법 두루마리의 말씀을 따라 온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하고, 예루살렘을 비롯해 전 유다 땅 안에 있는 모든 이방 우상(偶像)을 부수게 하고, 거기 종사하던 제사장들을 내쫓는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것이 요시야 제 13년임을 생각할 때, 예레미야의 예언은 요시야의 개혁이 있기 5년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때의 남 유다가 이미 망해버린 북이스라엘보다 더 악했다고 하는데, 그 사실은 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셨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조국 유다의 어둠이 깊어갈 때, 예레미야를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 렘 1:5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택하시기 전, 그에 대한 '앎'이 먼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그의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아셨고, 그 앎을 토대로 그를 성별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창조의 신비에로 이끌어 갑니다. M. 로버트 멀홀랜드의 표현을 따르면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여 존재하게 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창 1:26) '말씀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는데, 사람의 마음도 하나하나 지으셨기에(시 33:15) , 하나님은 이미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예레미야를 속속들이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레미야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알고 택하셨는데, 예레미야는 스스로를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대답이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 렘 1:6
우리는 예레미야의 대답을 보면서 그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창세기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 당신의 거룩하신 말씀과 손으로 당신 신성의 너울을 만드실 때, 하나님 마음이 부끄러우셨을까요? 혹은 당신의 창조물이 완전하지 못해 당신 스스로도 미덥지 못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어머니의 태(胎)에 나를 지으실 때,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토대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순명할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빼닮은 영적 저력이 나에게서 발휘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지으실 때 내 마음도 지으신 하나님, 내 마음이 당신 형상을 닮게 하신 하나님을 잊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고, 겸손을 가장한 불신앙에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을 '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나 '나는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에 나는 아직 영적 소양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레미야의 이런 고백은 엄혹한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잘 알기에 하는 말입니다. 어디 예레미야뿐입니까? 모세도 처음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실 때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출 4:10)라며 당혹스러워 한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고후 11:6)라며,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의 부담감을 솔직하게 토로한 바 있습니다. 심지어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를 '입술이 부정한 사람'(사 6:5)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결국 이런 반응들은 무얼 말하는 겁니까?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잘 전하는 것도 참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에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오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당시 회당예배의 전통대로 성경을 읽어주시는데, 사 61:1 이하의 말씀을 읽어주시는 걸 보았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8:18, 19).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읽어주신 이유는 "내 사명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 누가는, 예수님께서 읽어주신 말씀을 들은 이후,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 눅 4:22
감탄할 만큼 말씀에 은혜를 받았으면, 그 다음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그 말씀을 굳게 붙잡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전하는 '말씀'에 마음을 열어 반응하기보다는 요셉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사소한 면에 더 관심을 보입니다. 자기의 의식 안에 뿌리내린 관점의 틀이 자신의 감옥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여 존재하게 된 사람으로서, 말씀이 자기존재의 재질이요 고향인 자로서, 너무 아쉬운 반응입니다. 창조의 신비에서 멀어진 길을 너무 오랫동안 걸어온 듯합니다. 심지어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렙다의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예를 들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들을 책망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를 낭떠러지에서 밀어 죽이려고까지 합니다.(눅 4:24-29) 말씀을 들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부담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심지어 당시 민감한 정치적 상황 안에서 받았습니다. 사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해야 할 말씀은 당시 유다인들 뿐 아니라 왕이나 귀족들도 듣고 싶지 않아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북쪽 강대국들의 군대가 쳐들어올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니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여라"(렘 1:11-15)라고 전해야 합니다. 누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겠습니까? 실제로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전했을 때,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계속해서 예언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정말 가능하다면, 말씀도 선지자의 소명도 다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심정에는 아랑곳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 렘 1:7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겸양이 아닌 회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파고드는 두려움은 어찌할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 렘 1:8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들'은 유다의 최고 권력자인 왕과 관료들입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아나돗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과의 접경지역 사람으로 남 유다의 주류계층에 속하지 못한 변두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예레미야로서 두렵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인들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향한 소명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그리고 당신의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 렘 1:9
과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을 상기시키게 됩니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신 18:18) 과거 모세에게 주셨던 말씀 그대로, 다시 예레미야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결단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그가 처한 상황은 녹록치 않습니다. 그를 비판하는 소리도 험악하기만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냐'라는 궁중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예레미야와 완전히 다른 예언을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유다 민족이 완전히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갈 것이라고 예언할 때,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치시고 유다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을 거라며, 거짓된 메시지로 유다민족을 위로했습니다. 사람들이 누구의 말을 더 들으려 했을지 불을 보듯 뻔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입에 두신 말씀 그대로 전합니다. 그는 비로소 아이를 극복하고 성숙한 영적 어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입에 두신 당신 말씀을 불이 되게 하셨고(렘 5:14), 유다 사람들은 나무가 되어 말씀에 불살라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고집하며, 언어생활 대부분이 말씀에서 비켜 선 어른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니면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들려온 말씀을 끌어안고 전하는 가운데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있는 것일까요?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고전 13:11
사도 바울에게도 아이 같던 시절은 있었습니다. 그 아이 같은 시절이라는 것이 정말 나이가 어렸던 시절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확신이 지나쳐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핍박자요 포행자인 사울이었을 당시를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렸을 때, 그 때의 특징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다." 어린 아이의 지식은 자기중심적이고, 주관적이며, 감각적입니다. 반면에 성숙한 성인은 비교적 이타적이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자세를 추구합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의 언어와 감정과 생각을 버리고, 사려 깊고 반듯한 어른으로 성숙해 가야 하는 것은 육체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버렸노라' 라고 표현한 단어는 헬라어로 '쓸모없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어린 아이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쓸모없는 말이고 생각이고 행동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삶속에서 완전히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응송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 시 71:6
하나님께서 모태에 시인을 지으시기 전에, 자신에 대한 '앎'이 먼저 있었음을 시인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고, 지금도 항상 주를 찬송할 것이라는 그의 고백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물론 이 고백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 시 71:17
그는 고백과 같이 어려서부터 말씀에 의해 교훈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종일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 수 있었고, 종일 주의 공의를 전하는 삶을 살 수 있었고, 종일 주의 구원을 말하는 삶을 살 수 있었고,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M. 로버트 멀홀랜드에 의하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이십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말씀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갑니다. 이 이중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일치를 지향하는데,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마침내 우리로 그리스도의 존재와 행위를 닮아가도록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영성형성의 본질입니다. 이번 한 주 안에는 설날과 입춘(立春)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한 살씩 나이가 들며 성숙해지는 것도, 봄이 오면 꽃 틔울 준비를 하는 것도, 철든 사람의 마땅한 모습이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영적으로 철이 드는 것입니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하기보다 "내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고 고백하며, 설날도 입춘도 맞으시기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아이와 같은가?
②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말씀 안에서 성숙해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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