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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3주 말씀 자체인 그리스도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1-22 22:36
조회
749
주현 후 제3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느 8:1-3, 5-6, 8-10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 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 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 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 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 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 지 말라 하고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날은 우리 주 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응송 | 시 19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서신 | 고전 12:12-31a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 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 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 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 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 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 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복음 | 눅 4:14-21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 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 였느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느 8:3을 묵상하십시오.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백성들의 내적 치유와 회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② 눅 4:18-21을 묵상하십시오.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신 후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있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③ 고전 12:31을 묵상하십시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 씀이 자신에게 어떤 결단으로 다가오는가?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의 삶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자기의식 속에 저마다의 관점을 뿌리내리게 됩니다. 이 관점의 틀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 혹은 이웃에 대한 이해,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는데, 대개 사람들은 이 이해를 따라 자신이나 이웃, 혹은 하나님을 대하는 습관이나 태도, 대인관계 방식 등을 형성시켜 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의 틀은 종종 우리 자신의 감옥(監獄)이 되어, 스스로를 속박하기도 합니다. 이 관점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생활' 혹은 '영성생활'이라면, 우리의 영성(靈性)을 형성시키는 것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관점의 틀이라는 속박에서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세 가지 기본 관계, 즉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형성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뿐만 아닙니다. 말씀은 우선 우리의 거짓 자아의 구조를 깨뜨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자아를 갖도록 도와줍니다. 말씀이 이렇게 우리를 관점의 속박에서 해방시킬 뿐 아니라,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형성하도록 하고, 내 거짓 자아의 틀을 깨뜨려 참자아를 갖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말씀의 산물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M. 로버트 멀홀랜드는 자신의 책에서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a word:소문자)'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말씀하여 존재하게 된 말씀' 이라는 그의 고백에서 영적 청량함을 느낍니다. 그의 고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왜 말씀 앞에 서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말씀이 내 존재의 재질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우리 자신이 말씀 자체이며, 말씀이 내 존재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이유를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한 '택하사'라는 단어의 헬라어가 '에클레고 ἐκλέγω'인데, 여기서 '레고 λέγω'는 '말하다(to speak)'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원문에 맞추어 재구성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로 사랑 안에서 당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창세기 1장의 현장은 말씀으로 인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창조의 현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니 사람은 애초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였고, 그랬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실존의 함의(含意)를 꿰뚫어보게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떠나서는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었으며, 현재도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 서서, 매일 매순간 말씀을 들어야만 흠 없고 거룩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은 학사 에스라가 유다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으로 초대해 모세의 율법을 읽어주는 장면입니다. 이때 백성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에스라가 낭독해 주는 율법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느 8:1-5) 에스라가 말씀을 낭독하고 그 뜻을 깨닫게 해 줄 때(느 8:8), 백성들은 비로소 슬픔을 벗고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기쁨의 원천은 다름 아닌 '말씀'으로 지어졌고, 따라서 '말씀 자체'인 자신들이 비로소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 선 감격에서 우러난 참 기쁨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심층적으로 보겠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배경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조국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 이후의 상황입니다. 포로들은 BC 538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한 후, 이듬해인 BC 537년부터 3차에 걸쳐 귀환을 이루게 되는데, 1차 귀환은 BC 537년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인도로 이루어집니다(스 2:1-70). 2차 귀환은 BC 458년 에스라의 인도로 이루어지고(스 7:1-10), 3차 귀환은 BC 444년 느혜미야의 인도로 이루어집니다(느 1:1-2:11). 오늘 말씀은 3차 귀환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는데, 그는 바벨론 포로귀환 공동체와 함께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그 작업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어려움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첫째로,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성곽을 재건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둘째는, 페르시아의 왕들이 이 지역의 충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을 한 것이었고, 셋째는, 서로 다른 계층과 계층 사이의 끊임없는 알력과 갈등과 분열이었습니다. 또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전력을 다할 수 없는 것도 어려움 중 하나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것은 느헤미야의 적대자들의 방해와 유다 사람들의 불평이었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 일당은 집요하게 조롱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훼방을 했으며(느 4:1-12), 유다 사람들은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느 4:10)라며 낙망해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늦추지 않습니다.(느 4:9) 뿐만 아니라 한 손으로 일을 하고, 한 손에는 병기를 잡게 하는 이성적 냉철함도 균형 있게 유지했습니다.(느 4:17)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느 4:20) 라며 낙망해 하는 동족들을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 말씀이 이어지는데, 오늘 말씀은 매우 감격적인 장면입니다. 무너진 성벽을 모두 재건하고 난 후 느헤미야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는 동족들의 침체된 영적 정체성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성벽을 세우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백성들이 먼저 말씀에 갈급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우리 안에 있는 본능이 반드시 죄악된 것만은 아님을 잘 보여줍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당신 숨결을 불어놓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해, 말씀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숨결을 우리 안에 불어넣으셔서 우리가 영적존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에나의 카테리나 같은 성인은 "나는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를 호흡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존재가 말씀의 산물이고, 하나님의 숨결이 나를 관통하고 있는 까닭에 우리의 본성 안에는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자와 여자,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은 수문 앞 광장으로 몰려와서,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그들은 에스라가 율법 두루마리를 펼치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느 8:5). 그리고 에스라가 낭독해 주는 율법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여호와를 송축하면 백성들은 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며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느 8:6). 레위 지파 사람들은 아람어 밖에는 모르는 이들을 위해 히브리어로 낭독되는 말씀을 아람어로 통역해주었고(느 8:7), 백성들은 모두 그 말씀을 듣고 울었습니다.(느 8:8, 9) 그 눈물은 하나님 백성임을 망각한 채, 욕심에 이끌려 살아온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모여 말씀을 경청하고,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슬퍼하는 동안, 무너졌던 그들 내면이 다시 곧추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 말씀하여서 존재하게 된 말씀'이라면, 말씀은 늘 우리 안에 육화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육체적인 삶 뿐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정서적인 모든 영역까지 비로소 안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삶의 세계를 열어 보이며, 새로운 삶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불편함을 기꺼이 수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나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들려오는 말씀 앞에서 눈물 흘리는 백성들에게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레위사람들이 타이릅니다.
이것은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슬픔을 넘어 더 근원적인 기쁨을 바라보라는 초대입니다. 이런 기쁨은 진정성 있게 슬픔을 감내할 때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보는 자는 진정으로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와 사회 안에 드리운 어둠을 보는 자도 진정으로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정직한 슬픔을 끝내 외면하면 우리 영혼은 천박해지고, 우리는 스스로를 기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인의 기쁨은 슬픔을 피하고 얻는 기쁨이 아니라, 슬픔을 통과해서 얻는 기쁨입니다. 마땅한 길에서 돌아서 헛된 것에 집착하고, 사소한 이익에 시선을 빼앗긴 가련한 우리,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바로 그 기쁨을 느헤미야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그 기쁨이 너희의 힘이라"(느 8:10b)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그 힘은 외적인 힘이 아니라 내적인 힘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 기쁨과 내적 힘을 주시기 위해 고향 사람들에게 이사야의 말씀을 읽어주십니다. 40일간의 금식 기도를 마치고 마귀에게 받은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광야생활을 접고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마침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당시 회당예배의 전통대로 성경을 읽기 위해 일어섰고, 회당 책임자가 이사야의 글이 기록된 양피지를 건네주자 펼쳐서 사 61:1절 이하의 말씀을 읽어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이사야의 글을 다 읽으신 후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십니다. 누가는 이때,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눅 4:20)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께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씀을 하십니다.
공동번역 성경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이 성서의 말씀'이란 세상 변혁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이자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선지서에서 예언한 수많은 선지자들의 꿈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찾아 읽으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꿈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꿈은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눈 먼 자가 다시 볼 수 있게 되고, 눌린 자가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는 것입니다.(눅 4:19)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year of jubilee)을 가리킵니다.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해 즉 50년째 되는 해입니다. 희년에는 그동안 인간사회에서 벌어졌던 모든 왜곡된 구조와 질서가 제자리를 잡습니다. 희년에는 팔린 땅도 제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쌓인 빚을 갚기 위해서 땅을 판 사람도 희년이 밝아오면 땅을 되돌려 받게 됩니다. 또 희년이 오면 노예도 해방시켜야 합니다. 가난을 대물림하다 어쩔 수 없어 노예가 된 사람도 희년이 밝아오면 해방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꿈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성경의 말씀이, 우리가 그토록 갈망해왔던 성경의 말씀이, 바로 그 갈망 때문에 마리아는 자기 태를 내어줬고, 바로 그 갈망 때문에 사가랴는 자기 자식을 내어줬고, 바로 그 갈망 때문에 시므온은 자기 평생을 바쳤는데, 그 예언의 말씀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놀라운 선언입니다.
느헤미야 8장의 율법 낭독이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백성들의 회복의 시작이라면, 누가복음 4장에서의 예언서 낭독은 죄의 포로에서 풀려난 성도들의 회복의 시작입니다. 그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간명합니다. 오직 말씀만이 우리를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 존재의 재질이고, 우리 자신이 말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2천 년 전 나사렛 사람들처럼 주목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신 예수님 말씀에 아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려오는 것, 성경의 말씀이 내 가슴에 응해지는 것, 모든 희망은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말씀이 들려올 때 '아멘' 할 수 있고, 들려온 말씀에 순명하는 살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웃음을 회복하고 주님이 꿈꾼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참된 변화는 더욱 큰 은사인 말씀과 성령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세속적 가치관에 의해 형성되면 세속 가치관을 표현하는 쪽으로 발휘되겠지만, 우리의 언어가 내 안에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형성되면,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서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더욱 큰 은사인 '말씀과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들려올 때, 우리 마음으로 반응하고 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을 그저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해 내면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정보 습득을 위한 독서는 읽기만 해도 되지만, 영성 형성을 위한 독서는 나에게 말을 건네는 그 분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감은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의 4단계 영적 사다리의 귀고 2세가 제르바시오 수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의미 있는 말을 합니다.
독서는 입에 음식을 넣는 것이요, 묵상은 그것을 깨물어 씹는 것이요, 기도는 그것의 맛을 추출하는 것이요, 관상은 기운을 주고 즐겁게 해주는 단 맛입니다. 부디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말씀이 들려올 때, 마음으로 반응하고 영(靈)으로 화답하며, 자신을 관점의 속박에서 해방시킬 뿐 아니라,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하고, 말씀 자체인 자신을 아름답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말씀을 벗어난 관점의 틀이 자신을 속박(束縛)하고 있지 않은가?
② 말씀으로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과 관계를 건강하게 하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느 8:1-3, 5-6, 8-10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 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 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 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 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 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 지 말라 하고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날은 우리 주 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응송 | 시 19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서신 | 고전 12:12-31a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 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 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 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 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 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 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복음 | 눅 4:14-21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 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 였느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느 8:3을 묵상하십시오.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백성들의 내적 치유와 회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② 눅 4:18-21을 묵상하십시오.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신 후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있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③ 고전 12:31을 묵상하십시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 씀이 자신에게 어떤 결단으로 다가오는가?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말씀' 자체인 그리스도인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의 삶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자기의식 속에 저마다의 관점을 뿌리내리게 됩니다. 이 관점의 틀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 혹은 이웃에 대한 이해,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는데, 대개 사람들은 이 이해를 따라 자신이나 이웃, 혹은 하나님을 대하는 습관이나 태도, 대인관계 방식 등을 형성시켜 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의 틀은 종종 우리 자신의 감옥(監獄)이 되어, 스스로를 속박하기도 합니다. 이 관점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생활' 혹은 '영성생활'이라면, 우리의 영성(靈性)을 형성시키는 것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관점의 틀이라는 속박에서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세 가지 기본 관계, 즉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형성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뿐만 아닙니다. 말씀은 우선 우리의 거짓 자아의 구조를 깨뜨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자아를 갖도록 도와줍니다. 말씀이 이렇게 우리를 관점의 속박에서 해방시킬 뿐 아니라,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형성하도록 하고, 내 거짓 자아의 틀을 깨뜨려 참자아를 갖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말씀의 산물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M. 로버트 멀홀랜드는 자신의 책에서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a word:소문자)'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말씀하여 존재하게 된 말씀' 이라는 그의 고백에서 영적 청량함을 느낍니다. 그의 고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왜 말씀 앞에 서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말씀이 내 존재의 재질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우리 자신이 말씀 자체이며, 말씀이 내 존재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이유를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한 '택하사'라는 단어의 헬라어가 '에클레고 ἐκλέγω'인데, 여기서 '레고 λέγω'는 '말하다(to speak)'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원문에 맞추어 재구성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로 사랑 안에서 당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창세기 1장의 현장은 말씀으로 인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창조의 현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니 사람은 애초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였고, 그랬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실존의 함의(含意)를 꿰뚫어보게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떠나서는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었으며, 현재도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 서서, 매일 매순간 말씀을 들어야만 흠 없고 거룩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은 학사 에스라가 유다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으로 초대해 모세의 율법을 읽어주는 장면입니다. 이때 백성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에스라가 낭독해 주는 율법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느 8:1-5) 에스라가 말씀을 낭독하고 그 뜻을 깨닫게 해 줄 때(느 8:8), 백성들은 비로소 슬픔을 벗고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기쁨의 원천은 다름 아닌 '말씀'으로 지어졌고, 따라서 '말씀 자체'인 자신들이 비로소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 선 감격에서 우러난 참 기쁨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심층적으로 보겠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배경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조국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 이후의 상황입니다. 포로들은 BC 538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한 후, 이듬해인 BC 537년부터 3차에 걸쳐 귀환을 이루게 되는데, 1차 귀환은 BC 537년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인도로 이루어집니다(스 2:1-70). 2차 귀환은 BC 458년 에스라의 인도로 이루어지고(스 7:1-10), 3차 귀환은 BC 444년 느혜미야의 인도로 이루어집니다(느 1:1-2:11). 오늘 말씀은 3차 귀환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는데, 그는 바벨론 포로귀환 공동체와 함께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그 작업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어려움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첫째로,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성곽을 재건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둘째는, 페르시아의 왕들이 이 지역의 충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을 한 것이었고, 셋째는, 서로 다른 계층과 계층 사이의 끊임없는 알력과 갈등과 분열이었습니다. 또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전력을 다할 수 없는 것도 어려움 중 하나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것은 느헤미야의 적대자들의 방해와 유다 사람들의 불평이었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 일당은 집요하게 조롱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훼방을 했으며(느 4:1-12), 유다 사람들은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느 4:10)라며 낙망해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늦추지 않습니다.(느 4:9) 뿐만 아니라 한 손으로 일을 하고, 한 손에는 병기를 잡게 하는 이성적 냉철함도 균형 있게 유지했습니다.(느 4:17)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느 4:20) 라며 낙망해 하는 동족들을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 말씀이 이어지는데, 오늘 말씀은 매우 감격적인 장면입니다. 무너진 성벽을 모두 재건하고 난 후 느헤미야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는 동족들의 침체된 영적 정체성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성벽을 세우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백성들이 먼저 말씀에 갈급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 느 8:1
이 말씀은 우리 안에 있는 본능이 반드시 죄악된 것만은 아님을 잘 보여줍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당신 숨결을 불어놓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해, 말씀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숨결을 우리 안에 불어넣으셔서 우리가 영적존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에나의 카테리나 같은 성인은 "나는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를 호흡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존재가 말씀의 산물이고, 하나님의 숨결이 나를 관통하고 있는 까닭에 우리의 본성 안에는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자와 여자,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은 수문 앞 광장으로 몰려와서,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그들은 에스라가 율법 두루마리를 펼치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느 8:5). 그리고 에스라가 낭독해 주는 율법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여호와를 송축하면 백성들은 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며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느 8:6). 레위 지파 사람들은 아람어 밖에는 모르는 이들을 위해 히브리어로 낭독되는 말씀을 아람어로 통역해주었고(느 8:7), 백성들은 모두 그 말씀을 듣고 울었습니다.(느 8:8, 9) 그 눈물은 하나님 백성임을 망각한 채, 욕심에 이끌려 살아온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모여 말씀을 경청하고,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슬퍼하는 동안, 무너졌던 그들 내면이 다시 곧추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 말씀하여서 존재하게 된 말씀'이라면, 말씀은 늘 우리 안에 육화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육체적인 삶 뿐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정서적인 모든 영역까지 비로소 안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삶의 세계를 열어 보이며, 새로운 삶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불편함을 기꺼이 수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나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들려오는 말씀 앞에서 눈물 흘리는 백성들에게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레위사람들이 타이릅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 느 8:9b
이것은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슬픔을 넘어 더 근원적인 기쁨을 바라보라는 초대입니다. 이런 기쁨은 진정성 있게 슬픔을 감내할 때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보는 자는 진정으로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와 사회 안에 드리운 어둠을 보는 자도 진정으로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정직한 슬픔을 끝내 외면하면 우리 영혼은 천박해지고, 우리는 스스로를 기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인의 기쁨은 슬픔을 피하고 얻는 기쁨이 아니라, 슬픔을 통과해서 얻는 기쁨입니다. 마땅한 길에서 돌아서 헛된 것에 집착하고, 사소한 이익에 시선을 빼앗긴 가련한 우리,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바로 그 기쁨을 느헤미야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그 기쁨이 너희의 힘이라"(느 8:10b)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그 힘은 외적인 힘이 아니라 내적인 힘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 기쁨과 내적 힘을 주시기 위해 고향 사람들에게 이사야의 말씀을 읽어주십니다. 40일간의 금식 기도를 마치고 마귀에게 받은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광야생활을 접고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마침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당시 회당예배의 전통대로 성경을 읽기 위해 일어섰고, 회당 책임자가 이사야의 글이 기록된 양피지를 건네주자 펼쳐서 사 61:1절 이하의 말씀을 읽어 내려가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눅 8:18, 19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이사야의 글을 다 읽으신 후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십니다. 누가는 이때,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눅 4:20)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께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씀을 하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 눅 4:21
공동번역 성경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이 성서의 말씀'이란 세상 변혁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이자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선지서에서 예언한 수많은 선지자들의 꿈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찾아 읽으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꿈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꿈은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눈 먼 자가 다시 볼 수 있게 되고, 눌린 자가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는 것입니다.(눅 4:19)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year of jubilee)을 가리킵니다.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해 즉 50년째 되는 해입니다. 희년에는 그동안 인간사회에서 벌어졌던 모든 왜곡된 구조와 질서가 제자리를 잡습니다. 희년에는 팔린 땅도 제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쌓인 빚을 갚기 위해서 땅을 판 사람도 희년이 밝아오면 땅을 되돌려 받게 됩니다. 또 희년이 오면 노예도 해방시켜야 합니다. 가난을 대물림하다 어쩔 수 없어 노예가 된 사람도 희년이 밝아오면 해방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꿈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성경의 말씀이, 우리가 그토록 갈망해왔던 성경의 말씀이, 바로 그 갈망 때문에 마리아는 자기 태를 내어줬고, 바로 그 갈망 때문에 사가랴는 자기 자식을 내어줬고, 바로 그 갈망 때문에 시므온은 자기 평생을 바쳤는데, 그 예언의 말씀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놀라운 선언입니다.
느헤미야 8장의 율법 낭독이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백성들의 회복의 시작이라면, 누가복음 4장에서의 예언서 낭독은 죄의 포로에서 풀려난 성도들의 회복의 시작입니다. 그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간명합니다. 오직 말씀만이 우리를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 존재의 재질이고, 우리 자신이 말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2천 년 전 나사렛 사람들처럼 주목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신 예수님 말씀에 아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려오는 것, 성경의 말씀이 내 가슴에 응해지는 것, 모든 희망은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말씀이 들려올 때 '아멘' 할 수 있고, 들려온 말씀에 순명하는 살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웃음을 회복하고 주님이 꿈꾼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 고전 12:31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참된 변화는 더욱 큰 은사인 말씀과 성령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세속적 가치관에 의해 형성되면 세속 가치관을 표현하는 쪽으로 발휘되겠지만, 우리의 언어가 내 안에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형성되면,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서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더욱 큰 은사인 '말씀과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들려올 때, 우리 마음으로 반응하고 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을 그저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해 내면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정보 습득을 위한 독서는 읽기만 해도 되지만, 영성 형성을 위한 독서는 나에게 말을 건네는 그 분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감은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의 4단계 영적 사다리의 귀고 2세가 제르바시오 수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의미 있는 말을 합니다.
독서는 입에 음식을 넣는 것이요, 묵상은 그것을 깨물어 씹는 것이요, 기도는 그것의 맛을 추출하는 것이요, 관상은 기운을 주고 즐겁게 해주는 단 맛입니다. 부디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말씀이 들려올 때, 마음으로 반응하고 영(靈)으로 화답하며, 자신을 관점의 속박에서 해방시킬 뿐 아니라,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하고, 말씀 자체인 자신을 아름답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말씀을 벗어난 관점의 틀이 자신을 속박(束縛)하고 있지 않은가?
② 말씀으로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과 관계를 건강하게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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