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탄 후 제1주 마땅히 서있어야 할 자리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삼상 2:18-20, 26
18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19 그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 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20 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자 기 집으로 돌아가매 26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응송 | 시 148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며 총 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서신 | 골 3:12-17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 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 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복음 | 눅 2:41-52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 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 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 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 워 가시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삼상 2:18, 26을 묵상하십시오. 어린 사무엘의 삶의 자리는 어디였 습니까? 그리고 그 삶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② 눅 2:49, 52을 묵상하십시오. 소년 예수는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라고 말씀하셨으며 그 삶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③ 골 3:12-17을 묵상하십시오. 새 사람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 가 마땅히 입어야 할 새 옷은 어떠한 것들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마땅히 서있어야 할 자리
2021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코로나 19의 기세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변이 바이러스마저 출몰한 상황에서 올 한 해 무고들 하셨는지, 살얼음판 걷듯 조심스레 걸어온 시간들 속에서 기쁨과 보람을 체감한 순간들은 얼마나 있으셨는지, 끝내 아쉬움으로 남은 것들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박경리 선생은 자신에게 시간의 소리가 들려왔던 어느 한 순간, 톱니바퀴에 끼어 돌아가는 시간을 의식하며 "나는 강물로 살고 싶은데 / 나는 구름으로 살고 싶은데 / 아아 들판 싱그러운 풀로 살고 싶은데" 라며 못내 아쉬워했었습니다.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은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살고 싶었고, 들판의 풀처럼 왕성한 생명력으로 생기발랄하게 살고 싶었지만, 그러나 삶은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비교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Joseph Cambell)은 '블리스, 내 인생의 신화를 찾아서'에서 "나는 아직도 존재가 무엇인지, 의식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희열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다. 그것은 온전하게 현재에 존재하는 느낌,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 해야 하는 어떤 것을 하고 있을 때의 느낌이다." 라고 했습니다. 힘겨운 시간들을 '현재에 존재하는 느낌'으로 잘 견디어낸 자기 자신이 희열이라는 것인데, 그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 해야 하는 어떤 것을 하고 있을 때, 현재의 자신을 매우 긍정적으로 느낀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참된 나를 찾아낸 기쁨. 그보다 더 큰 희열은 없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한해가 저물고 새해를 맞이하려는 이때, 우리 역시 많은 아쉬움과 감회에 젖어들게 되지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현재의 자신에 대한 느낌이 긍정적이기 위해 해야 하는 어떤 것을 할 때가 아닐까 합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그러한 삶을 살아간 두 인물로서 구약성서에서는 사무엘을,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성경은 사무엘이 어렸을 때, 그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생활했는지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 삼상 2:18
여기 어린 사무엘이 입고 있는 '에봇(에포드 דופא)'은 제사장의 복식 중에서 가장 겉옷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의 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사무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어머니 한나의 서원에 순종해 어려서부터 경건한 삶을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결과에 대해 사무엘서 저자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 삼상 2:26
같은 시대에 함께 생활했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타락한 생활로 인해 심판을 받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생활했던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더욱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어렸을 때, 어떤 모습으로, 어떤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생활하셨는지를 알게 해 주는 한 마디 말씀이 소개됩니다. 그것은 눅 2:49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마치 육신의 부모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이후로는 하늘 아버지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듯한 예수의 이 한 마디는 육신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에게 있어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에서 당시 예수님이 어떤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0대 소년시기의 예수에게 있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는 '내 아버지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사무엘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경은 그러한 어린 예수님 삶의 결과를 이렇게 단언해 줍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이 이야기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 눅 2:41, 42
예수님이 막 십대로 들어서던 이 시기, 유대인의 교육과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의 역사와 전통이 담겨있는 책이지만, 단순한 역사가 아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해 오신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가 서사된 이야기책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말씀이 쓰인 성구갑을 손목에 매어 기호로 삼거나, 미간에 붙여 표로 삼거나(신 4:6-8), 문설주나 바깥문에 써 붙여 놓고 드나들 때마다 입을 맞추었습니다(신 4:9). 유대인 교육과정의 다른 하나는, 일 년에 세 번,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에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절기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기념하며, 민족적 동일성과 정체성을 재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간 사실, 그리고 이번에는 열두 살 된 예수를 데리고 간 것에서 우리는 그들 신앙의 신실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기를 마치고 나사렛으로 돌아가던 여로(旅路)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 눅 2:43-45
7일간 계속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나고 가족이 나사렛으로 돌아갈 때였습니다. 누가는 이때의 예수님 모습을 의미심장한 어조로 기록했습니다.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왜 아이 예수께서 부모님을 따라 내려가시지 않고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무셨는지,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성전에서 다시 부모님을 만났을 때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 마음의 일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 눅 2:49
그런 아이 예수님의 마음을 모른 채 요셉과 마리아는 하룻길을 간 후에야 아들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처음에는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아이 예수를 찾다가(눅 2:44), 끝내 보이지 않자 오던 길을 거슬러 가며 찾다보니 어느덧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흘이나 지난 후에 예수님을 찾게 되는데, 당시 예수님의 모습을 누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 눅 2:46, 47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게 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더불어, 그분의 인성과 맞닥뜨리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예수님의 유년기에 대한 누가의 기록은, 그분이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신 메시아라는 사실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동시에 예수님이 율법과 전통을 중시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양육되었다는 사실도 잘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은 신성을 갖추신 분으로서 완전하시지만, 동시에 율법과 전통 안에서 완전성이 계속 자라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크나 큰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아무리 완벽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의 거룩함은 더 완성된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이 시기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저명한 율법학자들 틈에 앉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시며 지혜를 더욱 쌓아가고 계셨습니다. 누가는 이때 듣는 자가 다 그의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겼다고 전해줍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런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누가가 했던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눅 2:40) 하지만 사흘이 넘게 어린 예수를 찾아 헤맨 요셉과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반가움과 함께 일말의 노여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들이 예수님을 찾았을 때의 장면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 눅 2:48
그런데 되돌아온 예수의 대답이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 눅 2:49
사흘 만에 만난 어린 예수의 이런 대답은 육신의 부모의 입장에서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는 육신의 부모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하늘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가 말하는 '네 아버지'와 예수님이 말하는 '내 아버지'가 다릅니다. 어머니는 '육신의 아버지'를 두고 말하는데, 예수님은 '하늘의 아버지'를 두고 대답합니다. 비록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요셉도 마리아도, 그가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마 1:20;눅 1:35)과, 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마 1:21)라는 계시를 받긴 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입으로 듣는 '내 아버지 집'이라는 표현은 매우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이 불협화음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신약성경의 유일한 언급인데, 혹자는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인간적인 발달과 성장에 관해 기록한 처음이자 마지막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 장면에서 보는 것은,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인식한 예수님과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는 예수님 인식의 성장 과정입니다. 이러한 예수님 인식의 성장은 마침내 생애 마지막에 방문하신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시는 과정에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눅 19:46)이라고 하신 것에서 일관성과 인식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성전에서의 예수의 말씀은 육신의 부모로서의 요셉과 마리아를 부정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만 자기 존재의 더 본질적인 뿌리를 가리켜 보여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만이 아닌 우리 모두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된 생명입니다. 나의 근본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나를 존재케 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 때만, 우리 삶은 본질적이고 영적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일생을 통해 일깨우려 한 것은 우리 삶은 먹고 마시고 입는 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육신은 밥을 먹어야 살지만, 영은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내 아버지의 집'이란 궁극적으로 우리를 참 사람으로 완숙시키는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 아버지 집을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지나간 한 해 동안 여러분이 마땅히 여기고 서있었던 자리는 어디였습니까? 다가올 새해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는 어떠한 자리이겠습니까? 어린 사무엘처럼 '여호와 앞에서'의 자리, 어린 예수님처럼 '내 아버지 집'이 마땅히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복음서에서 눈여겨봐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 눅 2:51
어린 예수는 이후로 완전히 부모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가지 않았습니다. 소년 예수는 다시 육신의 부모를 따라 고향으로 내려가 아들의 도리를 다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증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와 '이 땅에서의 삶'이 결코 동떨어진 세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지상의 삶과 하늘의 삶, 육신의 삶과 영적 삶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내 아버지 집과 '요셉의 아들'로서의 내 아버지 집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모든 순간이 영원에 잇대어져 있습니다. 영원에 잇대어져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찮은 일도 하찮은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 일도 허투루 하지 않고,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모든 사람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을 마땅히 여기시면서도, 다시 나사렛에 내려와 육신의 아버지께 순종하여 받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 있어 마땅한 삶이었다면 신자의 마땅한 삶은 바로 '예수님 같아진 삶'입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어린 아들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았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새해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골 3:10b)라고 소개하며,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 골 3:12-15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서, 사랑, 평강, 감사" 어떤 사람이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살아 있게 하십시오.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여러분의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십시오 | 골 3:16 표준 새 번역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심장에 살아있는 사람, 그리스도의 지혜가 내 심장에 살아있는 사람,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시와 찬미로 내 영혼에 넘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만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로 살아갑니다. 살얼음판 걷듯 조심스레 걸어온 시간들이 저물어 갑니다. 평생을 완숙함 속에서 살아온 거장도 인생의 황혼에 서서 "강물로 살고 싶었는데, 구름으로 살고 싶었는데, 아아 들판 싱그러운 풀로 살고 싶었는데"라며 생의 한 순간을 못내 아쉬워하는데, 시간의 소리가 예민하게 들려오는 이 때를, 우리는 소중하게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고, 해야 할 어떤 일을 내가 할 때, 우리는 현재의 자신을 매우 긍정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처럼 '여호와 앞에서', 어린 예수님처럼 '내 아버지 집'에서 마땅한 일들을 하며 시간이 채워져 가는 여러분의 새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성전을 떠난 나의 자리를 마땅히 여기고 있지 않는가?
②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마땅히 여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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