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대림절 제1주 주님을 우러러 사는 삶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렘 33:14-16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 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응송 | 시 2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 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서신 | 살전 3:9-13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복음 | 눅 21:25-36
25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 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 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 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 이 다 이루어지리라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 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 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렘 33:15을 묵상하십시오. 다윗에게서 난 한 공의로운 가지가 역사 속에 실현하실 가치로서 '정의와 공의'는 궁극적으로 무엇입니까?
② 살전 9:13을 묵상하십시오. 오실 주님, 도달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두 가지 자세로 바울은 각각 무엇을 말씀합니까?
③ 눅 21:34, 36을 묵상하십시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는 어 떤 결과를 낳습니까? 그 날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주님을 우러러 사는 삶
오늘 이 땅의 교회들은 일제히 대림절을 맞았습니다. 대림절은 한해의 교회력이 시작되는 절기이기 때문에 교회달력으로 신자들은 신앙의 새해를 맞은 것입니다. 이 신앙의 새해를 맞아 우리는 오늘부터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시간적으로 분할해 음미하고 참여하며 따라 걷는 영적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 여정은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대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대림(待臨 Adventus)'이란 어원은 기다림, 오심(내림), 다다름(도착)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특별히 교회력에 있어 대림 시기는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탄생 기념, 즉 첫 번째 오심에 대한 준비이고, 둘째는, 세말(世末)에 다시 오시는 성자의 재림과 심판에 관한 대비이고, 셋째는, 예배 중 그리스도께서 성만찬 안에 현존하심을 믿고, 성찬에 참여해 회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에 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중 둘째와 셋째는 하나로 묶어서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라고 합니다. 이 대림 기간은 대림절 제1주부터 12월24일까지 포함해 4주간입니다. 성탄절인 12월25일이 무슨 요일이냐에 따라 이 대림 시기는 빠르면 11월27일, 늦으면 12월3일부터 시작됩니다. 대림 시기동안 각 예배의 특징은 그날의 성서일과에서 드러나는데,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 모두에게 '깨어 기다릴 것'을 당부합니다.먼저 구약성경은 의로운 다윗의 자손에 대한 약속(렘 33:14-16)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렘 33:14) 라며 다윗에게서 난 공의로운 가지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에 대해 약속합니다.(렘 33:15)
서신서에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소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그 날이 임할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믿음과 마음을 굳건하게' 지켜서,'거룩함에 흠이 없기를 원한다'(살전 3:13)고 기원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덫과 같이 임할 그 날', 우리가 거룩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을 것을 당부합니다.(눅 21:34-36) 먼저 구약성경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 렘 33:14-15
히스기야가 죽고 난 후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까지는 불과 100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당시 고대근동의 신흥제국이었던 바벨론에 의해 BC 587년에 파괴되고 맙니다. 멸망을 앞두고 있던, 10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므낫세 왕이 BC 672년-642년까지 55년을 통치했고, 마지막 50년 동안은 아몬(2년), 요시야(31년), 여호아하스(3개월), 여호야김(11년), 여호야긴(3개월), 시드기야(11년) 등 6명의 왕들이 통치했습니다. 그 100년 동안 유다 왕국의 정세가 급속하게 멸망을 향해 치달은 배경에는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여호와 신앙을 외면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요시아 왕 제위 때 나름의 개혁을 주도했지만, 그마저 후손 왕들에 의해 또 다시 폐기되면서 결국 유다 왕국은 멸망을 피하지 못하고 맙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BC 627년 요시아 제위 때 부름 받은 예레미야는 마지막 다섯 왕이 통치하던 40여 년 동안 벌어진 유다 왕국의 비극적 결말을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BC 588년부터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유다 왕국은 이집트에 구조를 요청하며 1년 동안 버텼지만 끝내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의 총공격에 의해 BC 587년 7월, 함락되고 맙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궁이 잿더미가 되었고, 거기서 사용되던 집기들은 약탈당했습니다. 귀족들과 지식인들은 대부분 포로로 끌려갔고, 유다는 바벨론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비극적 상황을 눈물로 감내하며, 예레미야 선지자가 자기 민족에게 전한 메시지가 바로 오늘 구약의 말씀입니다.예레미야는 오늘 말씀에서 유독 '그 날'을 강조합니다. 14절에서는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고 했고, 15절에서는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라고 했고, 16절에서는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메시지는 렘 23:5, 6에서 이미 전했던 메시지와 같은 내용입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렘 23:5, 6의 문장은 시(詩) 형식이고, 렘 33:14-16은 산문 형식이라고 합니다. 문장 형태만 다르지 내용은 똑같습니다. 렘 23:5, 6에서도 '그 날'이 강조되었습니다. 5절에서는 "보라 때가 이르리니”라고 했고, 6절에서는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에서 '그 날'은 어떤 날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날'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 렘 33:14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의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예레미야의 이러한 영적 시각은 당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현상'으로만 바라보던 시각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들이 처한 운명을 현상으로 보지 않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 민족에게 어떻게 성취되는가 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국 유다가 망해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말씀의 성취'라는 새로운 희망을 보아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 날'을 역사에서 배웠습니다. 선지자들의 전통에서 배운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평소에 하나님의 '그 날'을 신앙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여러분은 역사의 흐름이나 여러분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십니까? 시대적 상황과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성경을 통해 이해하고 상황을 판단하며, 매 순간을 말씀이 성취되는 '그 날'로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그리하여 삶의 전 과정을 '말씀 안에서', '말씀을 믿는 자'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말씀 속 '그 날'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그저 현실에 일희일비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만약 우리 삶이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성경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겠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성취하실 일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예언합니다.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 렘 33:15
예레미야의 이 예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유다 땅에 이루실 정의와 공의는 '한 공의로운 가지'를 통해 실행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말씀한 '한 공의로운 가지'를 이사야 선지자는 '싹'(사 4:2)이라고 표현했고, 스가랴 선지자는 '순'(슥 6:12)이라고 표현했고, 다니엘 선지자는 '뜨인돌'(단 2:34)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정의와 공의는 바로 이 이상적인 왕을 통해 실행될 것인데, 그 분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훗날 사도 베드로는 이 장차 오실 메시아를 '머릿돌'(벧전 2:7)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 공의로운 가지에 의해 실행될 정의와 공의의 내용을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 렘 33:16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날' 이루실 일입니다. 이렇게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정의와 공의의 실현'을 철저하게 '유다민족의 구원'에서 찾았습니다. 표면적 시선으로만 보면 당시 바벨론 제국과 유다 왕국은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은 근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제국이었고, 유다는 여러 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국력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다는 바벨론이 주도하고 있는 고대근동의 이 억압적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제국들이 주도하는 세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의한 세상입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절대적 힘으로 작용하는 그런 질서는 정의롭지 못한 질서입니다. 바로 그 정의롭지 못한 질서 안에 내던져진 현실, 그것이 예레미야가 통찰한 조국의 비극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둘러싼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과 북이 평화를 이루어가려는 노력 속에서 가장 정의롭지 못한 현실은 강대국들입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찢겨진 나라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평화의 여정에 험난한 고비들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 옛날 유다의 예레미야의 심정과 오늘날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심정은 현실이 고통스럽다는 면에서 맞닿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절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면 유다의 구원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실 '그 날'이 반드시 역사 속에 이루어진다고 예언합니다. 그 날이 오면 유다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이 예언은 어찌된 일인지 유다민족의 역사 속에 실현되지 않고 맙니다. 유다의 구원과 예루살렘의 안전한 삶은 이후로도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고 팔레스타인에 유다를 재건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유다는 다시 다른 제국에 의해서 계속해서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 나라는 없어졌습니다. 자기나라 말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던 것일까요? 예레미야의 이상은 끝내 비현실에 머물고 만 것일까요? 예레미야의 예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바벨론을 무너뜨리는 방식이 아니라 훨씬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방식으로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군사력도 경제력도 아닌 '십자가와 희생'이라는 당신의 방식으로 정의와 공의를 세상 속에 이루셨습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가 예언한 그대로 다윗에게서 난 공의로운 가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맞이한 대림절은 우리에게 주님을 우러러 기다릴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응송은 다가오시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마음을 드높이는 성도의 신앙을 노래합니다.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 시 25:1-4
주를 우러러 본다는 것은 주님을 향해 순일하게 마음을 고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선인들은 마음의 순일함을 유지하기 위해 허리에 방울을 차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앉고 일어설 때마다 울리는 방울소리를 듣고 흩어졌던 마음과 정신을 새로이 가다듬었습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기도합니다.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 살전 3:12-13a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주님을 우러러 산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첫째, 마음을 굳건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이 기도는 두 가지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을 굳게 해 달라는 기도이고, 하나는 '인격'을 성숙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마음을 굳건하게 지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러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기도합니다.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살전 3:13b
바울이 말씀하는 주님을 우러러 산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었듯이 사도 바울이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전후맥락 없이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중요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바울 신학의 중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살전 2:19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그러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 것 같습니까? 내가 고대하고 기다리는 분이 강림하셨을 때, 내 모습이 부끄럽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오실 주님을 향한 고대(苦待)와 기다림이 우리 내면을 그토록 가꾸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 눅 21:34, 35
여기 기다림을 포기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지 않으니 자연히 시선이 땅을 향하게 되고,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생활의 염려로 그만 마음마저 둔해져버린 것입니다. 마음이 둔해졌다는 것은 직면하는 삶속에서 더 이상 신앙적으로 사고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는 뜻입니다. 둔해진 마음으로 현실에만 그때그때 반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오시는 날은 뜻밖의 덫처럼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 눅 21:36
사도 바울이 '그 날'을 기다리는 자의 자세로 '마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강조했다면, 주님은 '그 날'을 기다리는 자의 자세로 '기도'와 '깨어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마음을 굳건하게 하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고 있으며, 깨어있어 기도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우러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약속으로 받았을 뿐입니다. 그 약속을 우리는 희망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종말론적 대림 공동체입니다. 바벨론과 같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런 세상의 위협에 부화뇌동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고, 부활 생명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 날'은 옵니다. 응송에서의 시인의 고백처럼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하며 이 대림절을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서 '그 날'을 망각하고 있지 않은가?
② 소망으로 '그 날'을 기다리며 주님을 우러러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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