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5주 종말의 때를 대비하는 그리스도인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단 12:1-3
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응송 | 시 16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서신 | 히 10:11-14, (15-18), 19-25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 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 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 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 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복음 | 막 13:1-8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3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7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3:1을 묵상하십시오.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라는 제자의 시선과 나의 시선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② 단 12:3을 묵상하십시오. 지혜 있는 자와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 아오게 한 자에게 주어지는 은총은 어떤 것입니까?
③ 히 10:22-2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씻음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종말의 때를 대비하는 그리스도인
매해 교회력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로 수렴되는 왕국주일(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끝을 맺습니다. 따라서 올해의 교회력 역시 성령강림 후 마지막주일이자 왕국주일인 다음 주에 끝을 맺게 되는데, 이즈음 우리의 폐부는 종말이라는 단어에 더 민감해지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성서일과 역시 일제히 종말의 때를 언급하며 그 민감한 '때'에로 우리 시선을 이끌어갑니다. 만물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밖에서 혹은 그리스도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오늘 성서일과는 때가 어떻게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지를 밝혀줌으로써(단 12:1, 히 10:25, 막 13:2),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때를 대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종말의 때를 대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한다는 뜻이겠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만물은 찰나적 운명을 벗어날 수 있으며,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즉 죽음이 생명에 삼켜지는(고전 15:54), 궁극적 구원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에 오늘 성서일과에서는 두드러지게 악에 대한 선의 승리,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찰나에 대한 영원의 승리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선을 향한, 생명을 향한, 그리고 영원을 향한 갈망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갈망은 우리 삶의 첫 자리에 종말론적 고백을 놓고 살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종말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역사를 외면하고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먼저 복음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 막 13:1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성전을 떠나 나오실 때에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에 감탄한 한 제자가 "선생님, 저것 보십시오. 저 돌들이며 건물이며 얼마나 웅장합니까?" 하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대화가 있기 전 상황, 즉 11장과 12장의 상황에 대한 전 이해를 가지고 이 제자의 말을 반추해 보면,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11장에서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막 11:15-17) 그리고 11장 중반 이후부터 12장에서는 예루살렘 성전 당국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그 일로 인하여 날선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오시는 것은 단순이 시간이 되어 떠나시는 것이나, 볼일을 다 마치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형식과 위선으로 참 신앙을 망각해버린 종교인들에 의해 참 성전의 의미를 상실한 성전으로부터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찰나에 한 제자가 예수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채, 성전 외형의 웅장함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예수님 시선을 다시금 성전에로 돌리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가 '미석(美石)'이라고(눅 21:5) 표현한 바 있는 이 성전은 그 규모로 보나 치장한 자재들로 보나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헤롯이 자기의 이름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황폐한 스룹바벨의 제2성전을 재건한 이 성전은 건축 기간만 80여년(BC 19년-AD 63년) 걸렸고, 그 규모는 예루살렘 성의 1/6에 달했습니다.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당시 건축에 사용된 주춧돌 하나의 길이와 높이와 폭이 각각 11.4미터 × 3.6미터 × 5.4미터가 되었다고 하니 그 크기가 얼마나 웅장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성전 입구에는 큰 대리석 기둥들이 서 있었고, 성전 건물들의 외부는 흰 대리석으로, 지붕은 황금색으로 입혀져서 찬란한 황금색과 눈부신 백색의 조화가 화려함과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었고, 태양이 성전 위를 비출 때면 성전은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으로써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압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성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성전의 건축 양식을 보지 못한 사람은 화려한 건축물을 못 본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갈릴리에서만 살아온 제자들로서는 그 화려함과 웅장함이 놀라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포타포이 ποταποί),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포타파이 ποταπαί)"라며 감탄과 찬양을 연발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 막 13: 2a
'네가... 보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희랍어로 '블레페이스 βλέπεις'인데, 약간의 책망이 섞인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는 것을 앞에서 보았었고, 예루살렘 성전 당국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날선 논쟁이 벌어진 현장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뒤로 하고 성전을 나오신 것은 참 성전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유대교의 성전과 완전하게 결별을 선언하고 등을 돌린 것입니다.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제자들이 이내 성전의 화려한 외형에 마음이 빼앗긴 것을 보면서 주님은 그들의 영적 무지함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그럴 수 있습니다. 내면의 성전을 그리스도인답게 가꾸는 것보다, 외형의 성전에 더 마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참 신앙의 본질을 성찰해 그리스도인다움을 회복하는 것보다, 드러난 외형의 모습에서 신앙의 가치를 찾으려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를 지낸 한동일 교수가 쓴 '라틴어 수업'에 보면 '탄툼 비데무스 콴툼 쉬무스(Tantum videmus quantum scimus)' 즉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라는 라틴어를 소개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중요한 건, 아는 사람은 그만큼 잘 보겠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성찰하는 사람은 알고, 보는 것을 넘어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술사학자인 유홍준 교수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표현을 쓴바 있습니다. 누가 먼저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지식과 정보의 차원이라면, 성찰의 과정은 깨달음의 차원이라는 사실입니다. 한동일 교수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라는 말을 절감한 것은 자신이 매일매일 큰 관심 없이 다니던 길이 BC 44년 3월15일 로마 최고 통수권자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에게 암살당한 장소임을 알았을 때였습니다. 이것은 지식과 정보의 차원입니다. 몰랐기에 역사적 명소를 무심히 다닌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과 정보의 부재였을 뿐 자신에게 치명적인 약점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찰과 깨달음의 차원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지점을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표면적 차원의 앎과 감상을 넘어 보다 깊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갖기를 원하셨고, 눈에 보이는 건축물보다 더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알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 막 13:2b
주님께서 바라보시는 예루살렘 성전과 제자들이 바라보는 예루살렘 성전의 시선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제자들이 성전의 외관에 감탄하며 예수님의 동의를 구할 때,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정 반대의 말씀, 즉 보이는 성전의 완전한 파멸을 예고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앞에서 하신 행동과 말씀들 즉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신 행동(막 11:15)과, 무화과나무를 향해 하신 저주의 말씀(막 11:14, 20-21)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물론 때가 되면 모든 건축물은 무너집니다. 세월의 무게로 무너지든, 건축자제 탓에 무너지든 사람이 세운 모든 건축물은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런 자연적 무너짐이 아닙니다. 심판과 파멸로서의 무너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도둑의 소굴(巢窟)로 만들고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했던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멸망을 예언했던 예레미야(렘 7:12-15)처럼,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장사치들을 내쫓으시며, 그들 중 누구도 성전집기를 가지고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심으로써, 그릇된 전통과 위선된 신앙으로 성전을 부패시킨 종교지도자들과 그들이 우상처럼 숭배하던 성전의 심판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기 전에,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던 무화과나무(막 11:13)를 보고 예수님께서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막 11:14) 하신 것,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 무화과나무가 정말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막 13:20), 베드로가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막 13:21) 라고 말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무너질 것에 대한 묵시적 예고였던 것입니다."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는 예수님의 이 예고는 AD 70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무너짐으로써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티투스 장군은 다시는 예루살렘의 화려했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도록 성전을 포함해 모든 부속 건축물을 파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군인들 사이에는 성전 돌과 돌 사이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 70여 차례에 걸쳐 돌을 하나씩 하나씩 허물었다고 합니다. '보이는 성전' 즉 '건축물로서의 성전'이란 이렇게 거기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의 내적상태에 따라 참되고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져 갈 수도 있고, 거짓되고 흉물스런 탐욕에 더럽혀지다가 심판에 의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성전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무너질 건축물로 만들어 가는 사람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고후 3:16)으로서 착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면, 우리가 예배하는 교회당 역시 건축물만이 아닌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어가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다움을 상실하고 보이는 세계만을 숭배하며 살아버리고 말면 우리가 예배하는 교회당 역시 의미를 잃은 채 하나님 없는 건축물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시소에스 압바의 이런 금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라. 하나님께서 사시는 곳을 찾지 말고."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꿰뚫어 제시해주는 촌철살인의 가르침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 막 13:3, 4
무대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감람산으로 옮겨졌습니다. 하지만 대화는 같은 주제가 이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앉아서 건너편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고 계실 때였습니다. 성전이 무너질 것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가슴에 두고 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찾아와 소리를 낮추고 예수님께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성전이 무너지는 파멸이 어느 때 일어날 것인지? 둘째는, 그 파멸 전에는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 입니다. 그런데 단지 성전이 무너지는 사건 만이 아닌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라는 언급에서 우리는 제자들의 질문이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전 파괴가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 도래에 앞서 일어나는 사건 가운데 하나로 보고 포괄적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보십시오.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 막 13:5-8
예수님의 이 대답에는 경고와 묵시가 함께 뒤섞여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은 경고라 한다면,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은 묵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 경고와 묵시를 들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대답은 구약의 말씀에서 소급해 들을 수 있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늘 구약성경에 있는 다니엘 선지자의 예언을 염두(念頭)에 두신 말씀이라 하겠습니다.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 단 12:1
다니엘 선지자의 이 예언은 문학적 측면에서 볼 때, 오늘 복음서의 제자들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1절의 '그 때'는 일차적으로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시대(BC 175-165)에 유대인들이 겪게 될 처절한 환난에 관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더욱 먼 미래에 벌어질 사건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시대를 가정하면,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헬라의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인들이 토라(율법)을 공부하는 것을 금지하고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공포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그의 박해에 저항해 목숨을 걸고 성경의 명령과 전통을 지키는 이들도 있었지만, 화려한 헬라문화에 마음을 뺏겨 스스로 동화된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카베오 시대에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키십니다. 그때 목숨을 걸고 성경의 명령을 지킨 이들에게는 영원함 생명을, 헬라의 화려함에 동화되어 그리스식 도시를 만들고자 한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모욕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1절의 '그 때'가 먼 미래에 벌어질 사건을 가리킨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다니엘의 70이레 예언 중 마지막 대 환난 때인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성도들에게 극심한 박해가 가해질 그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니엘의 이 예언이 희망에 찬 메시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화려한 도시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마음을 오로지 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순명할 때, 하나님은 미가엘을 일으켜 호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구약성경 안에서 육체의 부활을 명백히 긍정하는 몇 안 되는 예언 가운데 하나입니다.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 단 12:2-3
"많은 사람이 깨어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다가 신앙의 죽음을 맞이한 개개인의 부활에 대한 은유(隱喩)입니다. 세상 지혜가 아닌 하늘의 지혜로 산 사람은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사람은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라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서신서의 말씀도 우리의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응원합니다.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히 10:19-25
이 격려가 마음에 닿으셨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함에 마음 흔들려하던 제자에게 주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하셨습니다. 화려하지만 곧 무너질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피를 뿌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길을 걸어가는 행복한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 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보이는 것들에 시선 빼앗겨 감추어진 영원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② 보이지 않는 선의 승리, 생명의 승리, 영원의 승리를 믿고 사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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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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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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