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4주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사람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룻 3:1-5, 4:13-17
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2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3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 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4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5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 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 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 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응송 | 시 127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서신 | 히 9:24-28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 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복음 | 막 12:38-44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 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 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 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 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2:43을 묵상하십시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 보다 많이 넣었다는 주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② 룻 3:1, 5을 묵상하십시오. 나오미와 룻의 마음은 각각 누구에게 머 물러 있습니까?
③ 히 9:26, 28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자기희생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사람'
신영복 선생이 쓴 '나무야 나무야'에 '어느 연기자의 갈채와 통곡'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관객들의 뜨거운 갈채와 함께 막이 내리면 연기자는 홀로 분장실에 남아 통곡했다고 합니다. 관객들의 갈채는 자신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주인공에게 바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왜 그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하고 무대 위의 그림자로 살고 있는가?" 이것이 통곡의 이유였다고 합니다. 관객의 갈채에 속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연기해 낸 드라마 속 인물에 자신을 비추어 표면적 자아를 통찰해 내는 그의 성숙이 부럽습니다. 이 이야기 끝에 신영복 선생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옛 사람들은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말라고 하는 '무감어수(無鑒於水)'의 경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만 그것이 바로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는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감어인(鑒於人)',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고 하였습니다.
때로는 갈채에 속아 자신에 대한 진실을 놓치고, 때로는 거울에 속아 자신에 대한 진실을 놓치는 우리이고 보면 '감어인(鑒於人)' 즉 자신이 연기한 드라마 속 인물에게 자신을 비추어 성찰한 주인공은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아르투로 파올리(Arturo Paoli)는 '사막일기'에서, 사막에 던져져 600킬로미터를 걸었던 샤를 드 푸코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분명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으면서도 시인하지 않고 누구보다 이타적인 삶을 살았다고 으스대기도 했는데, 결국 사막의 한계상황에 직면해서야 자신을 보게 되었고, 이기적인 삶을 살았음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 변하기도 하고, 사막에서 자신을 깨쳐 변하기도 합니다. 아르투오 파올리는 말합니다.
사막은 단순히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사막도 있다. 마음의 사막은 우리 마음을 자유롭게 하고 우리 마음에 '거룩하신 분'께서 머무시게끔 한다."
우리가 치열하게 마음의 사막을 걸으며 거룩하신 분 앞에서 표면적 자아를 극복하고 자신의 진실을 보고자 애를 쓴다면 우리는 하루하루 거짓 자아에서 벗어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아를 회복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거짓 자아를 끊임없이 강화하며 거기에 안주하고 있는 사람을 보여주고, 이어서 한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녀가 자신의 전부를 포기함으로서 그리스도 안으로 깊이 들어가 거기서 참 자아를 찾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서기관의 교만함을 비판하시면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는 이 두 이야기는 서로 아무 상관없는 듯 보이지만, 실은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를 보충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야기는 서기관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 막 12:38-40
서기관은 유대교의 율법학자입니다. 우리시대로 말하자면 신학자입니다. 당시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서기관은 오늘날의 법조인 역할까지 했습니다. 이들은 인텔리들이었고 사회적 신분도 높아서 유대인들은 자기 가문에서 서기관이 배출되면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들 서기관들의 행태를 세 가지로 묘사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기다란 옷을 입고 나다니며 시장에서 인사를 받는 것과, 회당이나 잔치 자리에서 윗자리에 앉기를 즐겨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과부의 재산을 삼켰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등쳐먹었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과부의 재산을 강도처럼 강탈하지 않고 율법조문을 해석해주고 과도한 금액을 요구하며 품위 있게 등쳐먹었을 것입니다. 셋째, 서기관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를 길게 했습니다. 길게 기도하는 것은 영적 성장을 위한 좋은 습관이지만, 그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기도를 통해 거짓 자아를 강화하고 있었고, 스스로 그 거짓 자아에 속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이러한 신앙행태를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40절의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이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은 좀 더 분명하게 번역해놓았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지금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모습으로 있다 해서 절대로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나의 거짓 자아를 인정해주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두 번째 이야기는 가난한 과부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 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 막 12:41-42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이 과부는 예수님께서 먼저 언급하신 서기관과 가장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존재입니다. 서기관은 사회 고위층에 속하고 과부는 가장 하층민에 속합니다. 당시 헌금함이 있던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여인의 뜰입니다. 나팔처럼 생긴 13개의 헌금함이 놓여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자진해서 헌금하는 헌금함입니다. 부자들은 많은 돈을 넣은 반면에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 동전을 넣었다고 합니다. 렙돈은 각주에 따르면 헬라 동전의 명칭입니다. 그것을 로마 화폐로 바꾸면 한 고드란트이고, 그 돈의 가치는 한 끼 식사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두 렙돈에 대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 막 12:43, 44
사실 표면적인 눈으로 보면 부자들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시각으로 이 헌금을 판단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보신 것은 헌금의 액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적인 태도를 보셨습니다. 과부는 자기의 전 재산과 함께 자기 자신까지 드리고 있지만, 부자들은 소유의 일부를 드리며, 정작 자신은 헌신에서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자신의 전존재적 실존을 걸지 않는 신앙이란 감상적 정신의 유희나 포장된 세속적 욕망, 혹은 경건한 종교 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전존재의 실존을 문제 삼지 않는 신앙은 마음을 공허하게 하고,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서기관들을 비판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여기 부자들과 서기관들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기 전 존재를 걸기를 기피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자아를 즐기며, 겉멋이나 부리는 그저 속물일 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허례, 허식, 허영, 허욕, 허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거짓 자아일 뿐이며, 허무요 죄이며 죽음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 거짓 자아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던 자신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나는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정형화된 시각을 형성하는 피상적인 외부의 모습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나는 감추어진 존엄의 현존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 땅 위의 단 하나의 진정한 즐거움은 우리의 거짓 자아로부터 탈출하여, 모든 피조물의 정수와 우리 자신의 영혼의 핵심 속에 거하시고 노래하시는 생명이신 그분과의 일치 속으로 사랑을 수단으로 하여 들어가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우리의 진정한 여정은 내면입니다. 즉, 그것은 성장, 깊어짐, 그리고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사랑과 은혜의 창조적인 행동에 대한 아주 거대한 복종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부자들을 비판하신 것은 이런 몸부림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감추어진 존엄의 현존 앞에서 자신을 보면, 거짓 자아의 누더기만 그저 남루할 뿐인데, 그 비루한 현실은 보지 못한 채 늘어뜨린 저 길다란 옷이며, 권위며 하는 것들이 다 뭐란 말입니까? 부질없는 허상이요 아침에 피었다 저녁이면 지는 잠시 잠깐의 꽃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부서지고, 샘에서 물 뜨는 물동이가 깨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부숴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전 12:6 표준 새 번역) 그러고 보면 자기 몸이 부서지기 전에 모두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과 합해진 과부의 선택은 얼마나 지혜로운 것입니까? 오늘 구약성경에 이 과부와 같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 룻 3:1-5
이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이기적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오미의 계획은 희생적이고, 룻의 실행은 순종적이고, 보아스의 대응은 인격적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신앙적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의 행복을 위해(룻 3:1)' 그녀를 기꺼이 보아스에게 보내줍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씀대로 순종해(룻 3:5)' 보아스에게로 가서 자기의 미래를 맡깁니다. 보아스는 기꺼이 룻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 그녀 안에 메시아 탄생의 길을 열어줍니다.(룻 3:6-13) 이렇게 대의를 위해 자기를 희생했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써내려가셨습니다.(룻 4:13, 17) 자기를 몽땅 희생한 자기희생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예수님이십니다. 서신서의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합니다.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 히 9:27, 28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 죽음은 단 한 번이고, 죽음의 이유는 죄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극적인 죽음을 말한 후에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언급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예수님의 모습에는 '고난당하는 종의 이미지'가 깃들여있습니다. 이사야 53:12에 나타난 고난당하는 종은 유다에서 베벨론으로 전쟁포로로 끌려가 고난당하는 유다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올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죄악의 대가를 두 배로 갚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한 고난을 대가로 후손들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온 후손들에 의해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 고난당한 종'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히브리서 기자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지고 고난당하신 종'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희생해 우리 모두에게 생명이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애써 예복을 길게 늘어뜨리고 그것으로 자기를 위장하고 과시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호화로운 예복으로 감춘다 해도 인간은 그 본질에 있어서 벌거벗은 존재입니다. 차라리 호화로운 옷 안에 감추어진 허례와 허식과 허영과 허욕의 가짜 자기를 포기하고, 과부처럼 룻처럼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드릴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자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진짜 자아는 그리스도의 바깥을 배회하는 자아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영원한 자아이고 참 자아입니다. 그는 자기의 중심을 열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진짜 자아를 뜻하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용어는 '속사람'이고, 거짓 자아는 '겉사람'입니다. 평생을 역사적 예수 연구에 매진한 '월터 윙크'라는 신학자는 '속사람'을 '참사람'이라고 재해석 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거짓 자아로서의 '나'를 넘어 내 심장에 그리스도께서 뜨겁게 살아계신 '진짜 자아' 즉 '참사람'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 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거짓 자아에 속아 허울을 자랑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②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아를 발견하고 새로워졌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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