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탄 후 제1주 애굽에서 불러냄을 입은 사람들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사 63:7-9
7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응송 | 시 148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서신 | 히 2:10-18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 실 수 있느니라
복음 | 마 2:13-23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 하신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 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 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2:15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린 예수를 애굽에서 다시 불러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사 63:7을 묵상하십시오. 애굽에서 불러냄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이 평생 노래할 것은 무엇입니까?
③ 히 2:11을 묵상하십시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났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애굽에서 불러냄을 입은 사람들
헨리 나우웬은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뮌스터 성당 예배에 참여했던 기억을 그의 책 '영원한 계절'에서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가 참여한 예배는 기쁘고도 장엄했고, 행렬이며 촛불이며 아주 기품이 넘쳤습니다. 대주교가 예배를 인도하며 말씀을 전했는데, 그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성당은 우리가 크리스마스의 신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까 방해가 됩니까?" 이 질문이 헨리 나우웬의 마음 깊이 와 닿았다고 합니다. 그 역시 아기 예수 출생 같은 초라하고 숨겨진 사건이 이렇게 웅장한 건물과 풍부한 예식을 존재하게 했다는 사실을 두고 한창 생각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찬란한 고딕양식과 성화와 조각과 예복과 스태프들과 긴 예식이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아마 헨리 나우웬이 가졌던 이 물음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보았음 직한 고민일 것입니다. 지난 성탄 예배 때, 우리교회에 주변 노숙자분들이 다녀가셨습니다. 그 분들은 환영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우리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몸에서 나는 냄새는 물론이고, 예배시간에 앉은 자리에 변을 보신 분도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한 분도 인상 찡그리지 않고 그 분들을 환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여러분이 참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들을 우리교회에 보내시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셨을까요? 아마도 우리 표정을 살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도 살피셨을 것입니다. 부끄럽게 고백하자면 저의 속마음은 하나님께 실망을 드렸을 것 같습니다. 그 분들로 인해 예배 분위기가 수선스러워졌고, 한번 흐트러진 분위기를 수습하기가 쉽지 않아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저는 주님이 그 분들 모습으로 그 날 오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으로는 그 분들을 환대할 수 없었습니다. 예배 분위기 망친 것이 싫어서, 그 분들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제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께 용서를 청합니다.오늘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이자 성탄절 후 첫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아직도 거리에는 화려한 조명과 트리가 꺼지지 않고 있고, 사람들은 성탄을 갓 지낸 행복함을 가슴마다에 여운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감정들이 우리에게서 아기 예수님 탄생 안에 감추어진 신비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쉽게도 성탄절 첫 주의 성서일과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 선물을 전해드리고, 들판의 목자들이 찾아와 경배했던 훈훈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천군 천사의 찬양소리도 들리지 않고 천사들의 따뜻한 메시지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들이 떠난 후에 | 마 2:13a
우리는 마태가 전하는 이 한 마디에서 이내 쓸쓸함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덧 성탄 축제는 끝나고, 동방박사도, 목자들도, 천사들도 모두 떠나고 뭔가 어두운 사건이 시작되고 있구나." 그 어두운 사건이 무엇입니까?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 마 2:13b
성탄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헤롯이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 한다는 끔찍한 소리를 듣습니다. 당시 유대의 왕이었던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전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마 2:2)에 관한 소식에 내심 위기를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찾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고 일러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힘으로 헤롯왕을 없애버리지 않고 구차하게 당신의 아들을 도망 다니게 하시는 걸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낯선 땅으로 아기와 함께 피난을 떠나야 하는 어린 부부의 가련한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아기 예수님이 피난을 떠난 후 헤롯이 더 광분해서 그 땅에 끔찍한 살육(殺戮)의 피바람을 일으킵니다.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 마 2:16-18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아기들이 칼날에 죽임 당하는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땅에 묻힌 라헬의 통곡소리를 듣습니다. 설마 이런 일이 정말 있었으랴 싶기도 하지만 헤롯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입니다. 권력욕과 의심의 화신인 그는 자기의 권좌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 해서 자기 아내와 아들과 장인까지 죽였습니다. 요셉의 가족은 채 마리아가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서둘러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세상은 그랬습니다. 초라하고 연약한 주님을 환대하기보다는 자기 권좌를 지키기 위해 죽이려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졸업예배를 겸해서 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우리 자녀들이 졸업 후 맞닥뜨릴 세상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무정한 살육을 피해 낯선 땅으로 가실 수밖에 없었듯이, 우리 자녀들이 맞딱뜨릴 세상 역시 마냥 따뜻하지도 호의적이지도 않습니다. 치열한 경쟁 가운데 입시 관문을 뚫어야 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 취업 관문을 뚫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런 세상이 낯설고 두렵다가도 언젠가 부터는 그런 세상에 동화되고 맙니다. 그렇게 누군가는 헤롯이 되어가고, 누군가는 헤롯을 피해야 살아남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의미 있는 설명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 마 2:14, 15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은 추하고 심각한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비참하게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러한 헤롯의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금욕주의자인 엣세네파의 쿰란 종파 사람들은 헤롯이 죽자마자 파괴되었던 본부로 돌아와서 다시 본부를 재건할 수 있었고, 헤롯이 죽자마자 마리아와 요셉도 어린 예수와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고,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태는 지금 이 말씀을 통해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성구를 인용함으로써 어떤 진리나 사실을 입증하려는 확증 방식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는 특별히 호 11:1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서 예수님의 애굽행이 단순한 피신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말씀을 계속 읽다 보면 그토록 을씨년스럽고 서럽기만 하던 요셉 가정의 애굽 피난 이야기가, "주께서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 하나로 뭔가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요셉 가정의 피난 이야기는 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는 '해피엔딩' 때문에 해답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그 '말씀'에 이미 해답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겪는 가슴 아픈 고생은 예수님 개인의 고통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애굽으로의 피신 이야기는 긴 역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사를 압축해 놓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15절의 '애굽에서 불러냈다'는 표현은 이미 민 23:22이나 24:8에도 나오는 표현이기 때문에, 어떤 성서학자들은 본문과 민수기의 말씀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애초에 히브리들이 애굽에서 고난을 겪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 내신 것처럼, 어린 예수의 가정도 애굽에서 고난을 겪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도 이런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삶 전체로 감내해야 했던 고난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포로된 자들과 눈먼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합니다.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 히 2:18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먼저 고난에 직면하심으로 이후에 고난당할 우리를 도우실 길을 찾으셨다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히브리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예수를 애굽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왜 불러내셨을까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라고 히브리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셨을까요? 헤롯이 죽음으로서 위험이 사라졌으니 마음껏 살아보라고 어린 예수를 불러내셨을까요? 오늘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합니다.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 사 63:7
하나님께서 히브리들을 애굽에서 불러내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고마우신 일,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우신 일들을 노래하며 돈과 권력이 전부인 세상에서 그 분의 사랑을 따라 살고, 그 분의 자비를 따라 살라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신 고마우신 일,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우신 일을 노래하며 그 분의 사랑을 따라 살고, 그 분의 자비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보았고, 우리는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우리도 히브리 노예들처럼 세속의 복판에서 죄의 종노릇 하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았고, 그 타협으로 얻어지는 이익을 홀짝이며 때로는 악인의 꾀를 따라 때로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파라오처럼, 헤롯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죄악의 애굽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교회를 뜻하는 희랍어 에클레시아는 '불러낸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불러내신 이유는 파라오처럼, 헤롯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행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삶이 아닌 타인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라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으니, 우리도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이유 없이 이웃을 사랑할 때, 세상은 아름답게 변할 것입니다. 풀섶의 이슬 내린 길을 걸을 때, 맨 앞에 서서 가는 사람을 가리켜 '이슬떨이' 혹은 '이슬받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런 사람입니다. 차가운 눈 속에 발을 딛고 서서 길을 내는 사람, 바짓단을 다 적시면서 앞서 걷는 사람 말입니다. 똑똑하고 영웅적인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랑에 감사하며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 히 2:10
이 말씀은 예수님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고난에 던지신 것은 그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당하심으로 인간과 동일한 존재가 되셔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완전한 조건을 구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어 더 감동스런 이야기를 합니다.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 히 2:11, 12
엡 2:2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했고, 요 4:44에서 주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며 유대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거룩함을 입어 '주님과 한 근원에서 난 자'가 되고, 주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헤롯의 칼날을 피해 애굽으로 구차한 피난길 떠나셨던 예수님을 다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불러내셨을 때, 어리신 주님은 이미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신 후였습니다. 애굽에서 돌아온 어린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 있는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정착합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Naz raios)이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나사렛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 표현 안에는 '네체르(netzer)' 즉 '줄기' 혹은 '가지'라는 어원에서 파생한 '이새의 줄기'라는 뜻과, 성별된 존재로서의 '나실인'이라는 뜻도 있지만, 당시 나사렛 사람이라는 표현 안에는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가진 열등감과 그들을 향한 경멸의 의미가 더 깊이 배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곳 나사렛 사람이 되어 보잘 것 없는 시골 마을에 칩거하시면서, 그곳 사람들의 열등감과 경멸을 함께 견디며 어린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유아 시절의 예수는 칼날의 위협을 견뎌야 했고, 어린 시절의 예수는 경멸의 시선을 견뎌야 했습니다. 어두운 데서 향기롭게 익어가는 포도주처럼 그렇게 예수님의 시간은 숙성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장성하신 예수님은 다시 고난의 길을 떠나십니다. 그게 하나님이 부르신 뜻을 따라 예수님께서 사는 법이었습니다. 아직 성탄절의 여운이 남아있고, 다시 한 해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은 달라져 보이지 않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여전히 배고프고, 피곤한 사람은 여전히 피곤합니다. 별을 보고 예수께 왔던 동방박사도 보이지 않고,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가 들었던 천군 천사들의 노래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흠뻑 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희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입고, 초등학교를, 중학교를, 고등학교를, 대학교를 졸업하고 마치 예수님께서 애굽에서 다시 나사렛으로 가시듯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여러분이 그 희망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루신 고마우신 일,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우신 일을 노래하며 그 분의 사랑을 따라 살고, 그 분의 자비를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자기 이익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이슬받이가 되어 바짓단을 흠뻑 적시며 이웃을 사랑할 때, 세상은 아름답게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일을 위해 애굽으로부터 불러냄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나와 내 가족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뜻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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