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한석문 담임목사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50:4-9a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 마다 깨우치 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 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 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응송 | 시 31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서신 | 빌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복음 | 마 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 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 다 하시고 42다시두번째나아가기도하여이르시되내아버지여만일내가 마시지않고는이잔이내게서지나갈수없거든아버지의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다시오사보신즉그들이자니이는그들의눈이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이에제자들에게오사이르시되이제는자고쉬라보라때가가까
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일어나라함께가자보라나를파는자가가까이왔느니라
■ 묵상 나눔
세상의 아픔을 업고 계시는 예수님
세상의 아픔을 업고 계시는 예수님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피 에타(Pieta)는 두 종류 입니다.하나는산피 에트로성당에있는피 에타입니다. 미켈란젤 로가24살때제작한 그작품에서어머니마 리아는아들예수의시 신을 무릎에 올려놓고 비탄에 잠겨 있습니다. 하지만그속에서감정
적인 동요는 보이지 않습니다. 초월적인 고요함이 신비스럽게 느껴집니다. 그 작품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마리아입니다. 다른 하나의 피에타는 밀라노 의 스포르체스코 성 박물관에 있는 ‘론다니니의 피에타’입니다. 이 작품은 미 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손을 댔던 미완성의 작품입니다. 그 조각에서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등 뒤에서 부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얼핏보면죽으신예수님이살아있는마리아를업고있는것처럼보 입니다. 아름다운 균형과 비례가 도드라진 산 피에트로 성당의 피에타보다, 투박하고거친느낌의이피에타가우리마음에더큰감동으로다가오는건 아마도 고통에 대한 공감 때문일 것입니다. 스물네 살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서보다 말년의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공감하 게 됩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께서 오히려 세상의 모든 아픔을 업고 계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 씀은 바벨론 포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고대 유다 사람들에게는 이 시대가 가장 치욕스러운 때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궁이 파괴되 었고, 나라가 붕괴되었습니다. 유다는 바벨론 제국(帝國)의 식민지가 되었습 니다. 바벨론에서 파견된 총독이 그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왕족을 비롯해서 지도급 인사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 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던 그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는 불문가지입니 다. 그렇게바벨론의포로가된사람중의하나가오늘구약의말씀을기록 한 제2 이사야입니다. 그는 이사야 1-39장을 쓴 제1 이사야나 이사야 56-66장을 쓴 제3 이사야와는 다른 시대에 산 사람입니다. 제2 이사야는 익명의 저자로서 영성이 유달리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개인적 으로도 큰 고통을 당했는데, 그는 자신이 당한 고통에서 장차 메시아에게 임 할 고통을 보았습니다. 이사야는 그 고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주 짧은 표현이지만 그가 당한 고통, 그리고 훗날 메시아가 당할 고 통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 등을 맡긴다”는 말은 채 찍으로맞는다는뜻입니다.당시의채찍은가죽끈끝에납덩이가달려있 었습니다. 그런 채찍에 맞으면 살점이 묻어납니다. 이사야는 점령자들에게 수염이 뽑히고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모욕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왜 그런 끔찍한 고통을 당했을까요? 오늘 말씀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제2 이사야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어렴풋 하게나마 이런 추정이 가능합니다. 제2 이사야의 예언이 시작되는 이사야 40장에 보면 그가 유다의 해방을 선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는 예루 살렘의마음에닿도록말하며그것에게외치라그노역의때가끝났고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사 40:2a) 노역의 때가 끝나 예루살렘으로 되 돌아간다는 건 바꿔 말하면 바벨론 제국이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 고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이 예언을 거부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정권입니다. 바벨론은 느부갓네살 왕 때에 가장 번성 했습니다.그들은몇번에걸쳐예루살렘을침략했고,그외에도여러나 라를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라했던가요?’10년가는권세없고,열흘붉은꽃없다’고, 바벨론의힘 도 무한히 계속되지는 못했습니다. 내우외환으로 점차 국력이 약해지던 그 들에게 있어서 ‘유다의 해방’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은 그야말로 불편하기 만한것이었습니다.그들은이사야를그냥둘수없었습니다.더이상이 런발언을하지못하도록할수있는방법을다동원했습니다.그들은채 찍으로 때렸고, 이사야의 수염을 뽑았고, 모욕하고 침을 뱉었습니다. 권력 의 속성은 늘 그렇습니다. 자신들에게 불편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침묵하 도록 유무형의 압력을 가합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예언을 거부하는 세력은 비단 바벨론만이 아니었습니 다.이사야의동족즉바벨론에포로로잡혀온예루살렘사람들중에도이 사야의 예언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의 포로생활에 이미 적응을 마친 사람들입니다. 사실 바벨론은 예루살렘에 비 해 모든 면에서 앞선 국가였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문명적으 로도 자기들의 조국인 유다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어느덧 강대국의 풍요 함에 길들여진 그들에게 있어서 머잖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거라는 이사 야의 예언은 현실성 없는 선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죄악이 사함을 받았 다”는 예언도 그렇습니다. 이미 여호와 신앙에서 멀어진 그들입니다. ‘죄악 ‘이니 ‘사함’이니 하는 용어들이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무엇 보다 그들에게는 좀 더 실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강하면 강할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바벨론에서 그들의 삶은 더 피곤해지기 만 했습니다.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바벨론에서의 삶인데, 그걸 흔들면 서 로 불편해질 게 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내심 달가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2 이사야가 처한 상황은 여간 곤혹스러 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변 제국의 압박은 나날이 더해만 가는데, 동족들 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없으니 제사도 할 수 없고, 다윗 왕조가 회복될 가능성도 요원했습니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대 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현실과 타협하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사 50:1-2의 탄식은 이사야의 탄식이기도 하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 자신의 탄식이기도 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 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 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 음은 어찌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 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그러면 그들은 아주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 다. 바벨론 포로 시절에도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하나님 말씀을 읽었습 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나름의 종교행위는 하고 있었습니 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 뭐합니까? 그들의 마음에 아무런 울림도 없었 고, 패배감과 무력감에 길들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영적으로 반응하는 사 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이 이들과 다를까요? 그 로부터2천6백년이지난오늘우리도실제로는그들과거의다르지않습 니다. 우리 역시 저들처럼 현실에 길들여져 있고, 적당하게 또는 노골적으 로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지혜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더불어 살고,함께잘사는길을모색하기보다경쟁력을갖추는것이더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다 보니 청소년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누(gnu) 떼처럼 학원에서 학원으로 이동해 다닙니다. 바벨론 포로가 아니고 무엇이 겠습니까? 칠십 년이 넘도록 남북으로 갈라져 죽기 살기로 싸우며, 화해 를 위한 진전보다 적대감에 더 몰두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정책으 로 미래를 열어가지 못하고, 강대국들의 정책에 따라 일희일비하고 있습니 다. 그러면 저들은 하나님을 몰라 그런다 치고 소위 기독교인이라며, 빛이 라며, 소금이라며 자신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 님의 뜻을 성찰하고 강대국보다 하나님의 뜻에 더 민감해 하며 우리가 살 아가는 자리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리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거기에 비례해 삶도 덩달아 피 곤해지니까 세상 사람들처럼 현실에 적절히 적응하며 침묵하고 사는 것이맞는 걸까요? 우리는 바벨론이라는 제국의 한 가운데서 제2 이사야가 살 아간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여기 4절에 따르면 주 여호와께서 그에게 ‘학자들의 혀’를 주셨고, 5절 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귀를 깨우쳐주셨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 대 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고 있었고, 삶이 곤고한 자 들을 말씀으로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바벨론 정권이 듣 기 싫어하고, 심지어 동족들마저도 불편하게 여기는 ‘말씀’을 과감하게 외 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박해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이사야 가 당당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근거는 여호와 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여호와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에 있었습니다. 그 는 그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 사 50:8
대개 자녀들이 그렇습니다. 남들이 다 ‘네가 잘못했다’고 욕해도 내 부 모가 ‘네가 옳다’고 지지해주면 사기충천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니까, 이사야가 사기충천해서 “나와 다툴 자가 누구 냐”며 외치는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하나 님때문에’당당해지는거아닙니까?물론이말씀을안다해도우리의현 실은녹록치않습니다.물론이말씀을안다해도우리의현실은녹록치 않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확실히 보이지만 하나님께 인정받는 건 보이 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듣고 깨우쳐서 말씀 대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의 기도를 보여줍니다.
바벨론에 적응해서 편하게 살아가는 것과 말씀을 깨우쳐 말씀대로 살 아가는 삶이 부딪치듯이,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나고 싶은 욕망과 아버지 의 잔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명이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는 장면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 고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현실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계신 것이 아니라, 당신 앞에 다가온 현실들을 ‘절대적 자유’로 맞이하고 계십니 다. 예수님께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 나타난 ‘아 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도 보십시오.
그리고 세 번째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셨을 때는 피곤함에 빠져있는 제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어진 시간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때때로 너무 영리해져버린 저를 느끼면서 정이 떨어져버릴 때가 한두 번 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것 인데, 그러나 예수님처럼 살아가기보다는 그냥 사람처럼 살아버리고 맙니 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경의 사람들도 저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 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는 스승을 은전 삼십에 팔았고, 베드로는 두 번 씩이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 라고 자신 있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람들 앞에서는 겁이 나서 “나 는 그를 모른다”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다른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고 말았습니다.(마 26:56) 사실 우리는 기도하며 십자가를 수용하시 는 예수님보다, 예수님을 팔았거나, 부인했거나, 도망쳐버린 제자들에게 훨씬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말씀들이 우리를 가만 놓 아두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현실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계시지 않고 당신 앞에 다가온 현실들을 ‘절대적 자유’로 맞이하셨습니다. 예수님 께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 나타난 ‘아버지의 뜻’ 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예언이 강하면 강할수 록 거기에 비례해 자신의 삶은 더 고통스러워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면서도 얼굴을 가리지 않고(사 50:6), 주 여호와께서 내게 ‘학자의 혀’를 주셨다며, 주 여호와께서 내게 ‘귀를 깨우쳐주셨다’며, 바벨 론 정권이 듣기 싫어하고, 심지어 동족들마저도 불편하게 여기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외치고 있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고백했습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 사 50:8
앞에서 말씀드린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머니 마리 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등 뒤에서 부축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죽으신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마리아를 업고 있듯이, 십자가에 달려 죽 으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풍파를 견디고 있는 우리를 업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당당함과 자신감의 비결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와 결단을 떠올렸습 니다. 그리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당당히 그리고 겸손하게 세상을 섬길 것을 권면합니다.
오늘 어느 누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이 세상 한복판을 당당 하게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고난주간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여정을 걸어 가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 분을 신뢰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견뎌내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음으로서 현실적인 타산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예수님의 가치관을 따라감 으로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 여정의 끝에서 주님 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얻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