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한석문 담임목사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본문 | 롬 3:19-24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 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묵상 나눔
3 오직 은총만으로
3 오직 은총만으로종교개혁의 원음을 찾아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종교 개혁자들의 은총 중심의 신학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구원론과 첨예한 대결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구원론은 중세 스콜라주의 가 설계한 ‘신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교회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 다. 중세 스콜라주의가 주장한 구원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 방향에서 정립 되었습니다. 하나는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변되는 ‘전통의 길(via antiqua)’ 이고, 다른 하나는 윌리엄 옥캄의 ‘근대의 길(via moderna)’입니다. 이 두 가지 길 모두 ‘인간의 도덕적인 선행’을 구원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요 전제 로 간주합니다. 결국 이러한 구도에서 구원론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 선 행’의 균형 잡힌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른바 ‘선행의인화(justification by good works)’ 신학을 낳게 되는데, ‘면죄부’ 판매는 이 ‘선행의인화’ 신 학의 대표적인 사례였고, 종교 개혁자들은 이 신학에 강력하게 저항했습니 다. 루터와 칼뱅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구원관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탈취해 버렸고, 하나님의 은총을 인간의 공로로 제한시켰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들 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죄를 제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강조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은총 중심의 구원론’을 전개하였으 며, 그것만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부합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의 는 그것에 상응할 만한 무슨 공로가 내 안에서 있어서 ‘주입(infusa)’되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 ‘전가(imputatio)’된다” 라며 마침내 종교 개혁자 들은 ‘오직 믿음을 통한 은총에 의한 의로움’이라는 ‘칭의(Justification by faith)’에 입각한 구원론을 탄생시켰습니다. 이 신학은 ‘종교개혁의 핵심’이 었고 ‘신앙생활의 요점’이었습니다.
‘칭의에 입각한 구원론’에는 ‘선언적 의미’와 함께 ‘신분적 개념’이 동시 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만 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자녀 삼으심으로 의롭게 하신다.’ 즉 ‘그리스도의 의(義)’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순간, 우리의 죄는 용서를 받고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 의 자녀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순차적이거나 단계적이 아니라 동시적인 사건이라는 겁니다. 훗날 모라비안 교도들은 종교 개혁자 들의 이 ‘칭의에 입각한 구원론’의 영향을 받아들여서 거듭나는 순간 동시 적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순간적인 성화를 믿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감리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 과 함께 주어지는 의로움이 구원의 출발점이지만, 그러나 이후로 점진적으 로 변화되는 ‘성화의 과정’ 즉 ‘기도, 금식, 성경 읽기, 집회 출석, 성만찬 참여 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리의 이러한 행동주의 신학 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게 바로 올더스케잇 체험입니다. 루터주의 경건운 동파인 모라비안 교도들의 올더스케잇거리 집회에 참석했다가 한 모라비 안 청년이 읽는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는 중에 마음이 뜨거워 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의 이 회심의 체험은 루터가 강조했던 ‘믿음 을 통한 은총에 의한 의로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이후로도 웨슬리는 구원론에 있어서 루터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설교 ‘하나님에 관하여(On God’s Vineyard)’에서 루터가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선행에 무관심했다고 비판합니다. “루터는 믿 음만 강조하다가 선행에 무관심했고, 가톨릭은 선행을 강조하다가 믿음에 무관심했다”고 웨슬리는 지적했습니다. 그러면 좀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 가서 이 구원론에 관한 사도 바울의 생각은 무엇이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바울은 율법에 관한 이야기로 자신의 구원론을 시작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원을 받는데 있어 율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렇다면 바울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했던 것일까 요?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서 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활동들, 이를테면 ‘제자나 무리를 향한 가르침’이나 ‘병 고침’이나 ‘기적’들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바울의 구원론에서 핵심이 되는 그리스도의 사건은 철저하게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구원사 를 생각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는 선언과도 일치합니다. 심지 어 예수님이 행하신 가르침도, 병 고침도 기적들도 구원의 사건과는 별개 의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 것이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 건 외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 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율법을 주신 걸 까요?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의 가치를 두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 째, 하나님께서 율법을 복음 보다 먼저 주신 이유는 우리의 ‘죄인 됨’을 깨 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런 면에서 율법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유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 다. 그러면 율법이 가르쳐 주는 우리의 죄는 어떤 것들입니까? 당장 십계 명만을 기준으로 보자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긴 것’이나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 있게 말합니다. “나는 우상숭배를 하 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사도 바울은 골 3:5에서 이렇게 말씀 합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태초의 사람이 선악과 앞에서 가졌던 탐 심, 오늘날 우리가 먹음직도, 보암직도, 탐스럽기도 한 것들 앞에서 가지 는 탐심,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우상 숭배자들임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이렇게 자신합니다. “나는 살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이 렇게 말씀하십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 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자는공회에잡혀가게되고미련한놈이라하는자는지옥불에들 어가게 되리라”(마 5:21, 22) 우리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간음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 는것을너희가들었으나나는너희에게이르노니음욕을품고여자를보 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 28) 이런 죄들이 과연 작은 것일까요? 주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마 18:24)를 통해서 우리 죄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죄 의 심각성을 알지 못한 까닭에, 속량 받은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죄의 심 각성을 잘 모르는 까닭에 죄에 대해 확실하게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 ‘값싼 은혜’를 남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항간에 회자되는 유체이탈 화법처 럼, 처절하게 자신의 죄와 대면하지 않고 마치 남의 말 하듯이 교리적인 차원에서만 ‘죄에 관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토록 은혜를 남발 하면서도 정작 그 삶에서 맺혀지는 열매라는 건 은혜가 무색할 정도로 그 리스도인답지 못합니다. 바로 거기서 복음의 은혜는 축소되고, 구원의 감 격도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마음은 자신의 죄인 됨을 처절하게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 이 처절하게 깨달아지는 사람만이, 지금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필 요한지 알고 그 은혜를 절실하게 구하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 ‘죄를 깨닫 게 해주는 율법’의 유익함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율법을 복 음보다먼저주신이유는 예수그리스도를믿는믿음으로구원을받는다 는 ‘하나님의 의’를 증언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 뿐 아니라 율법이 우리에게 증언해 주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모든 믿는 사람에게 차별 없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복음’이라 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차별 없는 구원, 그것이 바로 ‘복음’ 입니다. 율법의 길은 기본적으로 차별로부터 시작됩니다. “누가 더 많이 기도하는가? 누가 더 많이 자선을 베풀었는가? 누가 십일조를 더 많이 했 는가?” 그러나 복음의 길은 차별이 아니라 보편성입니다. 그 사람이 기도 를 더 많이 했든 덜 했든, 그 사람이 헌금을 더 많이 했든 덜 했든, 그 사 람이 자선을 더 많이 했든 덜 했든, 그 사람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 관없습니다. 22절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울의 이 말씀이 얼마나 파격적인 것이었는지 실감하지 못합니다. 당시에는 차별이 일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 르면 당시 유대인들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나사렛파 등등으로 파를 나누고 이방인과 죄인을 차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 따르면,예수그리스도를믿는믿음은이런차별이없이모든믿는사람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바울은 그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에서 죄를 지은 사람은 ‘모든 사람’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은 사람 도 ‘모든 사람’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그들 모두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 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주셨습니다. 이제 ‘의로움’은 더 이상 율법 의 성취가 아닌,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저 그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뿐이었습 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자신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유대인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하 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안 해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자본주의 안에서 살아서 그런지 우리는 대개 무언 가 행동을 보여야만 그 대가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 다. 그러나 우리가 뭔가를 대가로 지불하게 된다면 그 때부터 ‘하나님의 의’ 와 ‘그로 인한 구원’은 더 이상 은혜도 선물도 아닌 겁니다.
렘브란트의 작품 중에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남루한 옷에 흉한 몰골을 한 탕자가 등을 보인 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 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는 깊은 연민으로 그 아들을 바라보며 아들의 등을 어루만집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 옆에는, 냉 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아버지와 동생을 바라보는 맏아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허랑 방탕하게 죄짓고 돌아온 동생을 못 마땅해 하며 심판과 정죄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과 얼굴은 다릅니다. 사랑과 긍휼이 가득한 시선으로,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품에 안고 있습니 다. 우리는 렘브란트가 보여주고 있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와 긍휼 가 득한그은혜에빚을진사람들입니다.사도바울이그토록강조하고싶었 던것,마틴루터가그토록절규하며말했던것,그것이바로이은혜가 아니겠습니까?누가이은혜앞에서감히대가를말할수있겠습니까?어 지간한은혜를입은사람은이런저런대가를모색할수있지만,워낙커 서갚을수없는은혜를입게되면그저감사하는것외에는도리가없습 니다.그래서이은혜는그저값없이받을수밖에없습니다.중요한건그 다음입니다. 사랑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 을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갚을 길 없는 사랑을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내 죄가 심각했던 만큼 주님의 용 서와 사랑은 얼마나 따뜻했습니까?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그 사랑을 받으 면서 ‘사랑 받는 느낌’이란 게 무엇인지 이미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래서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 10:8에 보면 주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나병환자 를 깨끗하게 해주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후에 제자들을 보내시며 주님께서 하신 한 마디가 있습니다.
성도의 모든 선행은 바로 이 ‘거저 받은 은총’을 믿는 것에서 시작됩니 다. 사도 바울은 롬 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 셨느니라”라며 ‘믿음의 사람의 의(義)’가 철저하게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바로 이 ‘믿음과 선행’의 관계를 분명히 한 사람들입니다. 지난 주 주보에 실었던 한신대학교 김주한 교수님의 소 개에 따르면, 마틴 루터는 “참 믿음은 올바른 행위를 결과한다”라고 했고, 존 칼뱅은 “행위 자체도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총이 없다면 무익 하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인격 뿐 아니라 행위까지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까닭에 믿음은 그 자체로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결코 믿음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는다. 사랑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총에서 온 것이다.” 우리가 ‘오직 믿음’이라고 할 때, 그 ‘믿음’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도구’요 ‘수단’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알게 하 는 최고의 지식이고, ‘그리스도의 의(義)’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믿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선행하신 은총’을 깨닫게 하고 뒤따르게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일본의 엔도 슈샤꾸가 쓴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기독교 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던 17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소설 에서 포르투갈 출신의 신실하고 강직한 선교사 ‘로드리고’는 관원들에게 붙잡혀 회유를 당합니다. 주님의 성화가 그려진 ‘후미에(踏繪)’라는 나무판을 발로 밟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고, 그럴 생각 도 없었습니다. 한 평생 그 얼굴을 바라보며 살아왔는데, 어려움이 닥쳐왔 다 해서 어찌 그 분을 배신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관원들은 그가 후미에 를 밟으면 잡혀온 기독교인들을 살려주겠지만, 거절한다면 그들을 모두 처 형하겠다고 말합니다. 로드리고는 고심을 거듭하다가 결국 후미에를 밟기 로 합니다. 그는 자기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온 것, 가장 성 스럽다고 여겨온 것, 인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꿈으로 가득 찬 그것을 자 기 발로 밟아야 했습니다.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그의 온 몸을 감쌌을 것 입니다. 그런데 그때 목판 속의 그분이 로드리고에게 말합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다” 주님의 이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개 혁자들은 ‘오직 은총만으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은총 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파고들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이 은총 때문에’ 사랑스러워지고, ‘이 은총 때문에’ 조심스러워지는 참 믿음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